사드배치 논란 보니 ‘사대주의’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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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경북 성주군청 ‘주민과의 대화’ 에 참석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성주 주민들께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조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붙잡혀간 김상헌의 시다. 지금도 서울 송파 삼전나루에 가면 조선국왕이 청태종에게 삼궤구고(三?九叩)하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사람은 일제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인을 밑으로 볼 수 있었다. 대국인을 줄여 ‘되놈’이라고 부르고 “재주는 곰이 벌고 돈은 장궤(掌櫃)가 번다”는 식으로 중국인을 우습게 알았다.

조선 백성은 중국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는 모화사상에 물들었지만 조공 등 이를 뒷받침한 것은 모두 백성의 고혈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광해군은 지혜가 있어 흥기하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로 분란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준비도 없으면서 후금과 무익한 다툼을 벌였다. 분노한 후금의 태종 홍타지는 8기군을 몰아 폭풍같이 곧바로 한양으로 몰아닥쳤다. 왕은 왕후 비빈을 강화도로 보내고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미 차단되어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된다.

8기군은 1기가 7500명, 8기가 총 6만명에 불과하였으나 중국 역사상 드물게 잘 조직된 정예 기병이었다. 아마도 고구려의 철갑기병이 그것과 방불했을 것이다. 기다려도 8도의 근왕군은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왕은 결국 항복했다. 홍타지에 세번 엎드려 아홉번 머리를 찍었다. 삼궤구고(三?九叩)다.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궐기했던 백성은 더 이상 전란을 치를 기력이 없었다. 의병장들은 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광주에서 궐기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은 엉뚱한 누명에 걸려 참형에 처해졌다. 의주로 야반도주했던 왕과 대신들은 의병장에 정면으로 대할 면목이 없었다.

명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고 하여 지나치게 공덕을 돌린 것도 이런 약점 때문이다. 이순신이 이런 험한 꼴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명량해전에서 일부러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는 ‘자결설’이 나오기도 한다.

삼전도의 치욕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굴욕이다. 전대미문의 국난에 전혀 임금과 백성이 일치되지 않았다.당시 주화파와 주전파의 설전(舌戰)은 오늘날 사드를 둘러싸고 벌이는 난잡함과 다르지 않다. 영·정조에 일시 회복의 기미가 보였으나 순조 이후 척족세도(戚族勢道)로 조선은 일제 강점 이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졌다.

정치인들은 삼전도의 치욕을 상기하라. 사관생도는 임관 전 전투복을 입고 삼전도를 돌아본다. 군인들은 신병때부터 군인정신을 가다듬는다. 국회의원 등 국정의 주요책무를 맡고 있는 이들은 취임 전 이같은 엄숙한 다짐이 절실하다.

사드배치를 둘러싼 극단적인 논쟁이 안타까운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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