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수상에게 ‘강추’하는 두 영화, <덕혜옹주>와 <인천상륙작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60대 이상에게 일제강점기 역사는 생생하다. 을사오적은?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술,’ 1950년대 초등학생은 이를 모두 암기했다. 요사이 학생들은 ‘을사오적이 누구이며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겠다. 국사교육은 이런 것부터 해야 한다. ‘덕혜옹주’는 한 슬픈 개인 속에 현대 한국의 비극이 녹아 있다. 고종황제를 겁박하는 송병준 등의 부일역도(賦日逆徒), 임시정부와 황실을 연결시키려는 청년들의 독립운동,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유약한 황족 등이 복합되어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도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북한의 6·25 남침은 북한 인민군의 철저한 준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정부와 국군이 끌어들인 측면도 크지만, 소련에 비해 미국의 준비 부족이 끌어들인 측면도 크다. 그러나 6·25가 터지자마자 직감적으로 소련의 도발임을 판단하고 미군 투입의 결정을 내린 트루먼 대통령의 용단은 탁월했다. 맥아더는 직접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이때 한국군 병사로부터 받은 답변 즉 “상관으로부터 후퇴할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전선을 사수하겠다”는 말에 큰 인상을 받았다. 이는 군인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일이지만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가슴 뭉클하게 잘 그려져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략가로서 맥아더의 천재성을 증언한다. 브레들리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는 살아 있는 전설 맥아더 원수에 압도되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맥아더가 육군사관학교 교장일 때 생도였다. 브레들리는 유럽전선에서 영국군과의 연합작전은 잘 리드하였으나 전선을 돌파해 나가는 전장으로서 조지 패튼에 비해서는 크게 다른 종류의 장군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맥아더의 신화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이 성공하였어도 맥아더의 신화는 끝이 났다. 인천상륙 이후에 제2의 인천상륙 즉 원산상륙을 노려 8군과 10군단을 분리시키고 10군단을 일주일이 넘게 유병(遊兵, 떠돌이 병력)을 만든 맥아더의 작전지도상의 실패는 현대전에 드문 졸작이었다. 여기에 맥아더 통어(通御)의 결점, 단점, 약점이 모조리 집약 노출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인 실수다. 그러나 맥아더의 작전상 실패는 이 전략적 실패를 파국으로 만들었다. 이 실패가 오늘날 중국이 한국에 미군의 사드 배치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협박하는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제 영화 1천만 관중시대다. 영화 <남부군>, <태백산맥>이 크게 히트했던 시대가 있었다. DJ시대다. 이제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이 히트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문화예술계의 좌파성향이 도를 넘었다고 걱정하던 사람과 시대가 있었다. 이 변화는 시대의 반영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방위백서에 기술하는 아베에 이 영화를 보여주고 이것이 한국인의 진정이라고 밝혀주자. 아베는 <덕혜옹주>에서 다나카 육군대신으로 상징되는 이악스러운 군벌을 떠올린다.
아베는 도조 히데키 내각의 군수상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이를 아키히토 천황에게도 보여주어야 한다. 1933년생으로 조선황실에 대해서도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으로서도 깨닫는 바가 클 것이다. 일본 국민이 회오 각성(悔悟 覺醒)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사실(史實)을 가장 사실(事實)에 근접하게 만드는 영화예술에 공을 들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