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배치 논란 보니···”문제는 항상 내부에 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우리가 흔히 임진왜란이라고 통칭하나 왜가 처음 쳐들어온 것이 임진왜란이고 명과 왜의 강화가 결렬되어 왜가 다시 쳐들어온 것이 정유재란이다.

병자호란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합쳐 부르나, 정묘호란에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교를 맺었고 병자호란에서 군신의 관계가 되었다. 정묘호란은 이괄의 난이 기폭제가 되었다. 인조반정에서 이괄은 반정에서 병력을 통솔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반정 이후 문신 위주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었다. 이괄은 특히 김유와 갈등이 심했다. 김유가 이괄의 아들이 역모의 혐의가 있다고 무고하자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온 금부도사를 베고 거병했다. 이괄의 함경도 병사는 강병이었다. 이괄은 한양을 점령하였고 인조는 반란군에 밀려 수원으로 몽진을 가는 고초를 겪었다. 조정은 장만을 도원수로 해 이괄을 겨우 진압하였다. 무악재가 이때의 격전지다.

이괄의 부하들은 청으로 도망쳐서 홍타이지에 조선을 칠 것을 종용했다.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의 조선을 제압해야 했던 청이 이때다 하여 쳐들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청은 조선이 명과 관계를 깊게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 것으로 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그 후에도 조선과 명과의 관계가 지속되자 청이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명은 사르호 전투에서 패하여 천하의 형세는 이미 기울어진 것이었는데 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자초한 환난이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과 군신의 의를 맹약하고 인조는 삼궤구고두(三?九叩頭)의 치욕을 당했는데 이것이 천자에 대한 예를 차리는 중국 전래의 방법은 아니었다. 이는 적은 숫자의 여진족이 백배가 넘는 한족을 다스리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장치였다. 당시 여진족은 대략 1백만, 한족은 1억명이었다. 중원에 들어온 청 황제에 삼궤구고를 해야 하는 한족의 명문거족들은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허물어져 갔다.

삼궤구고가 명의 사대부들에게 굴종을 강요한 것이었다면 한족 백성들에게는 체발령을 내려 굴복시켰다. 청은 북경으로 천도하자 한족 남자들에게 만주족 전통의 체부변발(剃頭?髮)을 하도록 명하였다. 청조는 입관 전부터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한 자에게 복종의 증거로 체발을 하게 했다. “머리를 남기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남길 수 없고, 머리카락을 남기고자 하면 머리를 남길 수 없다”는 것처럼 그 시행은 철저하였다. 이는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堪害喪 孝之始也”를 으뜸으로 삼는 중화세계의 핵심이념인 유학에 대한 철저한 유린이었다. 다시 말하면 체두변발은 중화에 대해서 스스로 중화임을 방기(放棄)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명은 유적(流賊) 청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은 5세의 순치제를 안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었다. 一夫當關 萬夫幕開라는 천하의 요새 산해관을 열어준 것은 새로 흥기하는 청에서 한 자리를 얻으려한 명의 장수 오삼계였다. 오삼계는 명의 원수인 이자성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청에 투항하고 도르곤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강희제 시대에 청조가 안정되어 삼번을 폐하려하자 난을 일으켰다. 오삼계는 그야말로 한간(漢奸)의 전형이었다.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한반도와 중국·미국·일본이 복잡하게 얽혀가는 지금 이 시대의 오삼계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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