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집착 혹은 사랑’

피그말~1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어느 분이 인형을 사람이라 착각하여 사랑하게 될 뻔했다고 고백을 해왔다. 집착과 사랑이 무엇인지 조언을 청해 온 거다. 집착과 사랑에 대한 환영(幻影)을 바로 보는 것도 우리가 집착을 여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오늘 길을 걷다 키도 크고 잘 생긴 남자를 보았습니다. 멋진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제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아닌 인형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제 마음속에 생겨난 애틋한 감정, 따뜻한 사랑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만약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 인형을 지금까지도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여성들의 결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을 혐오했다. 그래서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한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혼자라는 외로움과 여성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 그는 자신의 이상에 맞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하여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게 옷을 입히고 목걸이를 걸어주며 매일 어루만지고 보듬어주었다. 마치 자신의 아내인 것처럼 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아프로디테’ 제전(祭殿)에서 일을 마친 피그말리온은 신들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해달라고 기원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피그말리온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 조각상을 사람으로 환생시켜 줬다.

당신이 이 조각상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고 사랑의 불꽃을 태운다면 어떻게 될까? 허망(虛妄)한 것에 집념을 불사르는 것이 바로 집착(執着)이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은 바로 따뜻한 사랑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만약 사랑의 감정이 생겼는데 그 인형이 사라져 아쉬운 미련이 남아 있으면 힘들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형상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순간에 사라진다. 찰나마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데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 세상을 붙잡으려는 마음, 바꾸어 말하면 세상을 떠나가야 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그것 때문에 우리는 다시 육도윤회(六道輪回)라는 긴 고통에 빠져든다.

그러나 위의 그 여인은 다행히 인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착도 미련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인형에게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사랑의 감정이 무너진 것이다. 자기의 몸이 살아있다고 믿기에 그 몸을 사랑하고, 자기의 몸을 남이 사랑하면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자기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연들을 만들고 느끼는 주인공인 ‘나’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몸을 느끼고 세상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잠들면 몸도, 세상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생사와 무관하고,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니 죽을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 놈이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여 있음을 느끼니 마치 자기도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세상은 인형과 같다. 인형에서 사랑을 얻을 수 없듯 세상자체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허망한 것이다. 세상은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다. 눈앞에 사탕을 살짝 보여주고 달아나는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와 같고, 찰나에 사라지는 번갯불이 연속되는 것과 같은 것이 세상이다.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려 한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집착을 하니까 저 깊은 마음 속에는 분노가 일고 집착이 생겨나 더욱 억지를 부리게 된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 했다’는 깨달음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간에 쌓은 집착과 분노로 인해 내생의 자기는 더욱 어리석은 정신이 될 것이 분명하다. 탐욕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수행자가 너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인형을 사람으로 착각한 채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꿈에 빠진 소녀와 무엇이 다를까 싶다.

일체가 너무도 허망하게 찰나에 사라지는 것임을 안다면 누가 집착을 하겠는가? 연기 같은 세상을 얻으려고 누가 보물 같은 지혜를 주고 바꿀 것인가? 얻어도 후회되는 것이 이 세상의 형상 있는 모든 것이다. 형상 있는 것은 찰나마다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허망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죽으려는 마음이다. 그 마음 앞에는 끝없이 세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세상이란 영원히 마음의 끝을 따라다니는 환상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깨닫는다면 ‘환상의 영원한 변화’ 즉 ‘변화 아닌 변화의 영원함’이 ‘인생’이고 ‘삶’이라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아무 것도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없지도 않은 환화(幻化)가 허공과 같은 깨달음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 ‘열반(涅槃)’의 모습이다. 우리 집착을 버리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을 여의면 인형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어느 장소에서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훈계한다. 미국 부모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양보하라고 가르친다. 그에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절대 남에게 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 역시 배려와 겸손이 결여된 집착의 결과다.

욕심은 부릴수록 더 부풀고, 미움은 가질수록 더 거슬리며, 원망은 보탤수록 더 분하고, 아픔은 되씹을수록 더 아리며, 괴로움은 느낄수록 더 깊어지고, 집착은 할수록 더 질겨진다. 이 집착을 여의면 번거롭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사는 일이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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