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 자선남비 백원짜리 동전도 배려심 담기면 재벌의 1백억 값어치

옛날 귀한 바닷새 한 마리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았습니다. 노나라 군주는 이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술을 베풀고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를 연주하여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소·돼지·양을 잡아 대접하였지요. 그러자 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근심에 잠겨 한 점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못하다가 삼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노나라 군주가 자신을 보양하는 방식으로 새를 보양했지 새를 키우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진정한 배려(配慮)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상대방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 상대를 향한 배려의 행위는 시원한 향기가 풍겨나게 한다. 배려하는 사람은 향기가 있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 그러나 배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배려는 나를 낮추는 것이고, 내가 먼저 손해 보는 것이며, 심지어 욕심을 버리고 자존심을 녹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배려는 사랑을 안겨준다. 배려하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또 배려는 학벌도, 물질도, 지위도 요구하지 않는다. 배려는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 왜 이처럼 귀한 것일까? 몇해 전 이야기다.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꼭 움켜쥔 돈 10000원을 들고서 잠실본동 동네 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로 분유를 사러 갔다. 분유 한 통을 계산대로 가져가니 가게 주인은 16000원이라고 한다.

힘없이 돌아서는 아이 엄마 뒤에서 가게 주인은 분유통을 제자리로 가져가 올려놓는다. 그러다가 분유통을 슬며시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아이 엄마를 불러 세우고 “찌그러진 분유는 반값”이라고 알려준다. 아이 엄마가 내놓은 10000원을 받고서 분유통과 함께 거스름 돈 2000원을 건네준다.

가게 주인은 8000원에 행복을 얻었고, 아이 엄마는 감사한 마음으로 분유를 얻었다. 여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주인의 마음에서 작은 극락을 본다. 배려는 저 멀리 따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부자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스스로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아직 우리네 세상은 살아볼 만한 배려와 인정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아주 오래전 군대생활을 할 때였다.

우리 부대에 한 이등병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입대를 했는데 늘 배고파 했다. 그런 그에게 내 밥을 조금씩 넘겨주었다. 이등병은 그것이 고마운지 저의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등병이 추운 겨울날 밖에서 언 손을 녹여 가며 찬 물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소대장이 그것을 보고 안쓰러워 한마디 건넸다. “김 이병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그 이등병은 소대장의 말을 듣고 취사장에 뜨거운 물을 얻으러 갔지만 군기가 빠졌다는 야단만 듣고 정작 뜨거운 물은 얻지를 못했다.

다시 빨래를 하고 있는 김 이병 옆을 이번에는 중대장이 지나갔다. “김 이병, 동상 걸리겠다. 저기 취사장에 가서 뜨거운 물 좀 얻어다가 하지” 김 이병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취사장에 가지 않았다. 가봤자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혼만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 병장이 그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김 이병, 취사장에 가서 더운 물 좀 얻어 올게 조금 기다려라.” 그리고 병장은 취사장으로 달려가 더운 물을 얻어 왔다. “김 이병 그 물로 빨래해라. 양은 많지 않겠지만 손이라도 녹일 수 있을 거야.”

소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병장님! 세 명의 상관 모두 부하를 배려하는 마음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상황파악을 하고 정말로 부하에게 도움이 된 것은 병장이었다. 우리는 마음만 상대를 배려하고선 스스로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 상대가 진정으로 원한 배려를 얼마나 했을까? <장자>(莊子) ‘지락’(至樂)편에 이런 우화(寓話)가 있다.

옛날 귀한 바닷새 한 마리가 노(魯)나라 교외에 내려앉았습니다. 노나라 군주는 이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술을 베풀고 순임금의 음악인 구소를 연주하여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소·돼지·양을 잡아 대접하였지요. 그러자 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근심에 잠겨 한 점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못하다가 삼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노나라 군주가 자신을 보양하는 방식으로 새를 보양했지 새를 키우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닷새를 위해 베푼 노나라 군주의 진심 어린 배려는 불행하게도 바닷새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일로 노나라 군주 또한 큰 상심에 젖었을 것이다. 결국 수혜자는 아무도 없고 베푼 이도 베풂을 받은 이도 모두 불행에 빠지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베푸는 이와 베풂을 받는 이 쌍방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배려일 것인데 그만 자기 입장만 생각해 베푼 것은 진정한 배려는 아니다.

배려는 상대의 입장에서 베풀어야 한다.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베푼 것은 배려가 아니다. 배려는 내가 베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베푸는 것이다.

<불경>(佛經)에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는 말이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주는 것 이 세 가지가 공(空)하여야 참다운 희사(喜捨)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배려하고 정신 육신 물질로 베풀 때에 오직 빈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참 희사가 되고 진정한 배려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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