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원불교 果山 김현 교무님, 당신 깊은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무아로 성자의 반열에 드셨습니다”?

[아시아엔=김창수 전 한빛고 교장] 내가 김현 교무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7월4일 경기도 용인 수지에 소재한 어느 수도원에서였다. 그 날은 우리나라 ‘대안교육’(당시에는 ‘새로운 교육’)에 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되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거기서 김현교무님은 ‘영산성지학교’(전남 영광 소재로 중도탈락자 및 중퇴자를 위한 학교)에서 교사로 살아왔던 본인의 교육경험을 풀어 놓으셨다.

이 자리에는 현직교사, 예비교사, 학자, 전교조 상근활동가, 학부모단체 대표, 새로운 학교 설립을 준비하는 사람,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 등 100여명이 모였는데, 모두가 교무님의 교육철학과 교사로서의 실천적 삶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서강대 교육학과 정유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교육학자보다 교육학을 더 잘 알고 있고 현장교사로서도 뛰어난 품성을 소유한 분 같다.”

 

과산(果山), 김현 교무님!

교무님의 삶의 자취를 들여다보고 그분을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그분의 모든 행적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성자(큰 어른)’가 아닐까 한다. 교무님은 원불교 성직자로서 원불교를 대표하는 민주화운동가, 환경생명운동가, 교육운동가로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사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늘 소리 없이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셨다.

내가 그분을 만나서 듣고 느낀 것은, 그분은 젊었을 때는 늘 자아를 들여다보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아로부터 해방된 삶을 사셨던 분 같다. 감리교신학대 교육학과 송순재교수님이 하시는 교육사랑방 회의 차 원광대에 갔을 때 교무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무아’ 그 자체였다.

회의를 마치고 익산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려는 나를 차로 데려다 주셨는데, 선생님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어디 아프신가고 여쭈었더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망가졌다고 하셨다.

고문했던 사람들과 그걸 사주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여쭈었더니,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일을 하였고, 나는 내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셨다. 맺힌 것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질문한 내가 부끄러웠다. 또한 익산역에 도착하자 다른 일정으로 바쁜 분이 내려서 기차 타러 가는 내게 허리 숙여 작별인사를 하시는 거였다. 그때 나는 “저 분이야말로 사람을 하늘로 모실 줄을 아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분과의 인연은 광주로 이어졌다. 교무님이 광주, 전남 교구장으로 오셨는데, 그 기간에 나는 광주에 철학, 인문학 대안학교인 ‘지혜학교’ 설립준비를 하고 있었다. 2009년 6월13일 학교설립 창립총회를 5.18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하였는데, 기꺼이 교무님이 오셔서 축사 말씀을 들려 주셨다. 후배 교사에게 참선생의 길과 참교육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주셨던 생각이 난다.

오래 우리 곁에 계셔서 후학들이 바른 길 갈 수 있도록 지켜보아야 할 분이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세수 71세, 법랍 50년. 선생님이 남겨주신 과제들이 이제는 우리의 몫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타파, 지역갈등과 빈부격차 해소, 노사문제 극복, 남북통일, 동아시아의 평화 진작, 생태적 위기 극복, 새터민과 이주민 문제 해소 등 수많은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각자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아 내는 것이 선생님을 여읜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선생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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