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 9] 김정희가 대한항공 조현아 ‘갑질’을 봤다면

추사의 세한도. 종이를 이어 붙힌 자국이 보인다.
추사의 세한도. 종이를 이어 붙힌 자국이 보인다.

[아시아엔=안동일 칼럼니스트] 요즘 갑질이란 말이 유행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 ‘우월적 지위’를 뜻하는 갑(甲)에 ‘행동’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인 ‘질;을 붙인 신조어다. 어감이 노골적이어서 그런지 꽤나 중독성이 있는 듯하다. ‘갑 행세’, ‘갑 노릇’과 같은 순화된 표현도 가능할 터이지만, 방송과 신문이 더 앞장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질’의 또 다른 의미인 되풀이되는 행동의 뜻까지 더해져 투박하고 거친 어감을 지니게 되면서 이 땅의 많은 을(乙)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던지고 있다. 서방질, 도둑질 할 때 쓰는 그 ‘질’이다.

기실 갑질이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님에도 최근 계속 이어지는 지적과 지탄은 가진 자, 힘센 자, 갑의 횡포가 더 교묘해지고 심해졌다는 것이기도 하며, 시민정신이 성숙해짐에 따라 불평등한 사회현상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 예전과 달리 가속 내지 증폭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어느덧 갑질의 문제는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부당한 갑질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을 노릇의 반란’ 곳곳에서 목격된다. 경제민주화도 따지고 보면 대기업의 갑질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분노한 을의 요구다.

하지만 ‘갑’은 일부 집단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상대적 강자를 의미하기에 누구나 갑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혹시 우리는 언젠가 갑의 위치에 섰을 때 그 힘을 빙자해 ‘질’을 하지는 않았는지. 요즘 공직자 청문회를 보면 그동안 이 땅에서 크고 갖가지 갑질 놀음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 같은지 모르겠다.

실사구시와 입고출신을 주창했던 추사는 갑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추사는 갑질에는 참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따져보면 추사의 일생이야말로 갑질에 맞선 을의 고군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문세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신동이 어떻게 을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의외로 고난과 슬픔의 연속선상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권문인 가문을 잇기 위해 어린 시절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가 생부 생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부모를 떠난 8살 소년의 한문 안부편지는 내용의 의젓함 때문에 보는 이의 마음을 더 짠하게 한다. 그리고는 10대 초중반, 주변 인물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는 줄초상을 겪어야 했다.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죽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조부 조모야 그렇다고 해도 양부모로 모시게 된 백부, 백모 그리고 숙부, 생모, 거기다 조혼했던 첫 아내까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부 김노경 공이 남아 그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생부에 대한 효성은 남달랐다.

당당했기에 추사는 ‘을 편’에 설?수 있었다

이런 그의 환경은 삶과 학문 그리고 예술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세상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태도였다. 그의 ‘을 노릇’은 실학자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학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시로는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그것도 실세 벽파의 중심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기득권을 분연히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을’이었던 북학인의 길을 걷는다. 그는 알려진 실학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힘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학문, 입고출신을 내세웠던 고증적 학문 태도 역시 주류였던 성리학 입장에서 보면 을의 반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을로서의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 당당한 태도로 갑질을 규탄했고 종당에는 갑의 항복을 받아내 을의 입지를 세우곤 했다. 학자로서도 예술인으로서, 또 정치에 참여한 경세가로서도 그의 출발은 언제나 소수인 을이었다.

추사체로 대변되는 그의 서체는 주류인 송설 조맹부의 맥을 잇는 동국진체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됐다. 그의 서화 또한 형식주의가 만연하던 당시의 화단에 서권기를 담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인화의 기풍을 복원 진작시키면서 호평을 받았고 종국에는 서단과 화단을 자신의 류로 통일했다.

세자의 스승으로서 그는 세자를 개혁적 군주로 키우려 갖은 애를 썼고 얼마간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개혁 경세의 뜻은 좌절 되고 정적들에게 호되게 당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의 옥고와 귀양살이 또한 갑질에는 못 참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다른 어사 같았으면 안동 김문의 일원인 사또의 비행 갑질을 적당히 눈감아 주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노년에 북청 유배의 빌미가 된 조천례 논쟁 또한 조카의 양자가 되어 임금에 오르는 불합리를 에둘러 지적했던 일이다. 그는 적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따져보면 그의 적들은 모두 갑질을 일삼는 무리였다.

반면 그는 을에게는 항상 관대했다. 따스한 봄바람과 같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형식과 체면을 배격했다. 그래서 장년의 사대부가 임금의 행차 길에 징을 치며 격쟁을 할 수 있었고 했고, 제주 귀양 시절 임금이나 권세가가 글을 써달라고 하면 종이가 없다고 핑게댔지만 서책을 보내준 중인 역관에게는 아껴둔 상급지 몇 장을 손수 이어 붙여 세한도를 그려 줬다.

국보급 서화인 불이선란도 또한 먹동인 하인 달준에게 그려준 것이다. 그가 그 가치를 몰라 시큰둥하자 막 유배에서 돌아온 중인 제자가 가로채기는 했지만.

언제나 을이었던 추사는 지금 와서 보면 갑이다. 갑질의 근원은 소통과 배려의 부재에 있다. 갑질의 폐해가 사라지려면 함께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왜냐하면 나도 지금 현재 누군가에게 ‘갑’이고 ‘을’이기 때문이다.

간결하면서도 고상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예술인 추사는 ‘갑질’이라는 구조적이며 거친 표현이 서서히 매력을 잃게 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2 comments

  1. 갑질에 대한 분노는 도덕센서의 작동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 분노가 사그러지는 세상이라면 희망 또한 희박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추사의 분노는 사회의 건강성을 향한 노력이었겠지요.

  2. 이땅의 ‘을’들은 추사의 당당함을 배워야겠군요. 일종의 폭력인 갑질은 나쁘지만 더 나쁜건
    ‘비굴’이라고 추사도 그러셨고 마하트마 간디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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