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⑩] 김정희의 분노조절법···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

추사의 . 고양이의 눈에서 비탄에서 일어난 희망이 보인다.
추사의 <모질도>. 고양이의 눈에서 비탄에서 일어난 희망이 보인다.

[아시아엔=안동일 칼럼니스트] ‘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라는 추사의 휘호가 있다. 직역 하면 “세상사는 맛의 첫째는 책 읽는 맛이고, 둘째는 여자요, 셋째는 술 마시는 즐거움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내용의 파격 때문에 위작(僞作)이라고 여기는 후인도 꽤 있지만 필자는 오히려 그 호방함 때문에 진품이라고 본다.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서필(書筆)로 녹여 낸 걸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갑질’ 못지않게 요즈음 유난히 널리 쓰이는 말이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인격 및 행동장애, 그중에서도 습관 및 충동 장애의 한 범주로 분류되는 소 항목에 해당하는 질환임에도 대 항목, 중 항목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화를 못 참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화나게 하는 일이 더 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얼마 전 새벽 경상북도 포항에서 40대 남성이 모는 승용차가 30대 여성 앞으로 돌진해 치고, 앞에 있던 문구점까지 밀고 들어가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의 이별통보 때문이었다는데, 문구점까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이 남성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여성을 폭행했다고 한다. 최근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상대 차량을 삼단봉으로 내려친 ‘고속도로 삼단봉 사건’, ‘주차시비 야구방망이 폭행’, ‘층간소음 살인’, 그리고 연이어 발생한 ‘엽총살인’ 사건도 화를 참지 못해 비롯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건강보험 당국에 따르면 2014년 ‘인격 및 행동의 장애’(질병코드 F60~69)로 진료받은 환자는 1만3028명에 달했다. 그중 남성은 8900여명으로, 여성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연령대별로는 10~30대가 전체의 63.7%를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분노조절장애의 원인이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데 있다고 분석한다. 풀지는 못하고 장시간 쌓이기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은 큰데, 이를 제때 풀어주는 방법을 개인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스트레스를 걸러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얘기다.

예전에 ‘술 권하는 사회’라는 말이 현진건의 단편소설에서 유래돼 ‘00을 권하는 사회’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얼마 전에는 ‘구타 유발자’라는 영화 탓에 ‘00 유발자’란 말이 한참 유행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분노조절장애의 케이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분노 유발자’들이 너무도 많아 ‘폭력을 권하는 사회’가 된 것은 아닌지 겁이 덜컥 난다. 이 사회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공분을 자아내는 분노 유발자들이 여기저기 촘촘히 박혀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경우의 분노는 조절가능하고 승화 가능한 분노일 것이다.

추사의 .
추사의 호방함과 파격이 엿보이는 그의 휘호 일독,이호색,삼음주. 제주유배 직후인 용산시절의 글씨로 추정된다.

모함 받아 죽기 직전까지 고문받아

억울하고 화가 나기로 말하면 추사만큼 그랬던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인생 최고 순간에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모함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져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다. 그 해 추사는 중국 연행의 좌장인 동지부사에 임명된다. 위기를 느낀 안동 김문은 청조 학예계에 영향력을 행사해 입지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는 추사의 연행을 기필코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윤상도의 옥사를 재론해 무고한 추사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행색이 욕된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었고 그 다음은 나무에 꿰어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두 가지를 다 당하였습니다. 40일 동안 이와 같이 참혹하게 당한 일이 고금의 어느 곳인들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추사가 지우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고문의 실상이다. 하지만 추사는 이런 곤욕을 다하면서도 오히려 굳센 신념을 붓 끝에 올려 불굴의 의지를 태연히 화폭에 담았다. 자약한 태도를 잃지 않은 것이다. 55세에 제주로 귀양 가는 도중 남원에서 고양이를 그린 ‘모질도’(??圖)는 이런 추사의 풍모를 대변해 준다. 추사는 “그래도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긴다”며 이를 알리기 위해 벗이 있던 산사를 굳이 찾아갔다.

제주 유배생활은 9년 기나긴 세월을 됫박만한 한칸 방에 갇힌 채 보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 부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 사별의 통한을 맛보고, 절친했던 종형과 사촌누님의 부음을 받기도 했다. 추사는 환갑을 적소에서 쓸쓸히 보내야 하는 처량함도 느껴야 했다. 이런 감당하기 힘든 회한과 고통을 추사는 독서로 극복하고 서화로 승화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범상한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탈속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청경고아하고 삼엄졸박한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일독서 이호색 삼음주’는 분노뿐 아니라 ‘희노애락 사단칠정’(喜怒哀樂 四端七情)을 조절하게 된 원숙함에서 나온 자신감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공분이라 부르는 공적인 부문에 있어서의 분노는 얘기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무작정 화가 날 때마다 그대로 표출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전문가들은 분노와 화를 억누르기보다는 취미생활이나 운동 같은 신체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힘을 기르라고 권고한다.

2세기 전의 선인 추사는 우리에게 화를 승화시키는 방법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별나게 금슬 좋았던 부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주 유배지에서 극심한 슬픔과 비탄에 떨면서도 붓을 들어 “지극한 슬픔과 기막힌 원한은 풀어내면 무지개가 될 것이고, 맺히면 우박이 될 것”이라면서 “좋은 뜻으로 승화된 분노는 족히 공자님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기에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깊다”는 내용의 애도문을 지었다.

이 땅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제 붓을 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우박 같은 글과 무지개 같은 노래로 분노가 승화됨을 체현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분노유발자들이 아무리 판 치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 차원의 폭력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comments

  1. ‘일독 이 호색…’ 이 휘호는 덕희가 자신의 별장 서호정에 추사를 초빙해 작은 술상을 차려 대접하고 금원을 인사 시킨날 그날 밤 거처로 돌아온 추사가 거나한 김에 쓰지 않았나 싶다. 전적으로 필자의 흥분되는 상상이다.,
    필자의 현학 소설 ‘세한연후’는 이 상상에서 시작된다.
    두 빼어난 예인의 학문과 재주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겠는가. 열심히 쓰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제현께 밝힌다.

  2. 필자는 분명히 추사와 그녀가 만났으리라 본다. 금원은 추사를 몽매토록 사숙했던 문인이다. 금원이 원주 기방을 찾았던 덕희에게 유난스럽게 다가서 마침내는 건너방을 차지했던 까닭도 덕희가 추사의 동생이었다는 점에서 였다.
    기록에는 추사가 과천 과지초당 시절, 세상을 떠난 남편 덕희를 추모해 금원이 지은 제망부가를 보고 깜짝 놀라 문재를 칭찬 했다는 후일의 일만 있지만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있었던 두 걸출한 예인이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을리 없다.

  3. 필자 추기
    추사에게는 김덕희라는 명민한 6촌 동생이 있었다. 제주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에게 용산(한양 한강변) 거처를 마련해 준 이다. 덕희에게는 기생 후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금원이다. ‘호동서락기’라는 빼어난 시집을 펴낸 조선후기의 대표적 여류시인 그녀다.
    그무렵 금원은 남편의 후원으로 용산강가에 서호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여류 시사회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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