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 8] 지록위마·정본청원·사필귀정·회천재조·거직조왕···.
[아시아엔=안동일 칼럼니스트/동아시아 연구가] 추사바라기를 자처하는 필자와 같은 매니아들에게는 경하할 일이 최근 있었다. 추사의 동상이 건립 제막 된 것이다. 그것도 세군데서 거의 동시에 건립됐다. 한군데는 세웠다가 닷새 만에 뽑아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동상건립은 추사 매니아들에게는 일종의 숙원이기도 했다.?1980년대 후반 설립된 추사기념사업회가 앞장서 진작부터 추진했는데 이번에 추사의 대표적 연고지라 할 수 있는 충남 예산, 경기도 과천 , 그리고 제주 대정리 등 세 곳에서 거의 동시에?건립된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공공장소의 동상 건립은 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고 관련법규가 상당히 많다. 국난극복 및 국권수호에 공헌했거나 문화·학문·기술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고 대다수 국민감정에 부합해야 한다. 관련 부처도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등 중앙부처까지 복잡하다. 게다가 형상의 사실성과 건립 예정 장소와 동상과의 조화 여부도 심의대상이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번번히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시절 인연이 맞았는지 이번에는 해당 자치단체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충남 예산의 추사 생가(2014년 10월)와 경기도 과천 과지초당 추사박물관(2014년 11월)에 이어 지난 12월12일?서귀포 대정리에 추사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들은 모두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조각한?김영원(홍익대 명예교수) 원로 조각가가 맡았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동티가 났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추사 적거지를 훼손했다며 문화재청이 제동을 건 것이다. 서귀포시는 동상 건립에 앞서 문화재청에 ‘추사유배지 현상 변경 허가신청’을 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문화재 원형 보존을 이유로?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이를 무시하고 건립이 강행됐는데 문화재청이 발끈하자 부랴부랴 철거한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서귀포시는 추사 적거지 인근에서 동상을 세울 공공용지를 물색 중이라고 한다.
사실 필자의 바람으로는 이왕 기념관이며 박물관이 있어 추사의 체취를 익히 느낄 수 있는 기존 장소보다는 예산군청 앞, 과천 시내 중심가, 서귀포 번화가에 세워졌으면 한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추사의 훈향을 맡을 것 아닌가. 하지만 추사에 대한 평가와 추모의 정도가 아직은 그 정도인 것으로 알고 만족하기로 했다. 과천과 예산에 가면 잘 만들어진 추사의 상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2015년 새해가?벌써 이주일이 흘렀다. 교수들이 새해 바람을 담은 사자성어로 ‘근본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정본청원’(正本淸源)을 꼽았단다. 정본청원 다음으로 교수들이 많이 꼽은 사자성어로는 어지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라를 건설하다는 뜻의 ‘회천재조’(回天再造). 그 다음으론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이 표를 얻었다. 곧은 사람을 기용하면 굽은 사람을 곧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을 지닌 ‘거직조왕’(擧直錯枉)도 네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작년 12월에도 <교수신문>은 한해를 되돌아보는 ‘올해의 사자성어’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의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 거론되고 지지받은 사자성어들이 작금의 우리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지만 필자는 먼저 추사를 떠올리게 된다.
지록위마와 사필귀정
특히 정본청원이며 사필귀정은 벼슬길에 나섰던 추사의 좌우명과도 같다. 추사는 벼슬과 과거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24세에 생원과에 장원급제 하고도 그 후 10년 세월을 중국 연행 때 만난 두 스승과 학우들과의 서신, 서책 왕래며 국내 동무들과의 시회 등에 힘을 쏟았다. 또?틈만 나면 전국의 비첩을 살피러 유람하곤 했다. 그러던 1819년(순조19년) 34세때 식년시에?급제한다.
임금이 친히 나서 과거를 보라 종용했고, 이에 추사는 은근히 걱정하던 아내 예안 이씨를 위해 응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조는 월성위 봉사손의 급제를 축하하기 위해 보약을 내리기도 했다. 추사가 처음 제수받은 벼슬이 시강원 설서(說書),?즉 세자를 가르치는 직책이다. 그후 필선, 검열, 수찬, 대교 등 학문과 관련 있는 직책을 두루 거친 뒤?41세(1826)때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우도에 파견된다. 이때가 추사의 공직활동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데 그의 성정에 걸맞게 뛰어난 어사였던 모양이다. 충남 서산에는 ‘영세불망’이라고 극찬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추사가 110여일 충청도 일대를 다니며 암행한 내용을 적어 조정에 올린 친필 보고서인 서계(書啓) 가 2008년 발굴돼?그의 활동을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조정에 내는 보고서였던 까닭에 정자체로 쓰여졌다.?암행 결과를 정리해 보고한 관리는 감사 1명, 목사 1명, 군수 9명, 판관 3명, 현감 24명 등 모두 59명이었다. 이중 비리가 현격한 10명을 직권으로 봉고파직 했는데 이중에는 비인 현감(庇仁 縣監) 김우명(金遇明)이 들어 있다.
다음은 서계의 일부다.
‘비인 현감 김우명은 부임한 이래 괜찮은 업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을 처리할 때는 비열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이익을 볼 때는 아주 작은 이익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낭자한 원성을 자초했습니다. (중략) 기타 허다한 범법 사항을 이루 다 나열하기도 어렵습니다.’
김우명은 안동 김씨 문중의 일원으로 이때 파직에 앙심을 품은 그는 문중과 작당해 추사 부자를 끊임없이 모함해 끝내는 추사를 제주유배에 이르게?한다.
결정적인 기화가 바로 윤상도의 옥사였다. 윤상도가 10여년 전에 상소를 올려 탐관오리를 탄핵하려 했으나 군신 간에 이간을 시킨다는 이유로 오히려 추자도에 유배된 사건이다.?추사가 당시?탄핵 상소문 초안을 만들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모함이었다. 이같은 지록위마에 놀아난 당시 조정도 문제는 문제다.
하지만 전술한 대로 추사의 제주 유배는 그의 학문과 예술을 한층 심도있게 한 절차탁마의 기간이었다.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와 낭중지추(囊中之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추사 동상건립이 바로 그 사필귀정이 아닌가 싶다.
어사일을 잘 수행하고 나면 대개는 후환을 당하는 모양입니다.
다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