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1) 왜 다시 추사인가?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영국 사람들이 말했단다. 멀리 그 시대까지 거슬러 갈 필요 없이 서구의 피카소와 엘리엇 그리고 러셀을 합한 이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는 추사 김정희다. 세 사람은 자기 방면에서 뛰어난 성가와 업적을 이룬 20세기의 명장 들이다. 이중 한 사람 만 이라도 견줄 수 있다면 괄목할 일인데 세 사람 모두를 합쳐야 한다는 것은 예의 영국인의 과장 아닌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추사의 파격적이며 독창적인 서체는 당시에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었던 피카소의 큐비즘 추상화와 견줄 만하고, 그의 천의무봉 시문은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 날렸고 각고의 섭렵으로 현대 주지시의 새 장르를 연 엘리엇과 비견 된다. 유복한 명문 세가의 옥엽으로 태어났지만 안주하지 않고 현실 참여에 적극 나서 환난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펼쳤다는 점에서 러셀과도 닮았다. 러셀이 당시를 풍미하던 관념주의를 배격하고 분석철학을 내세웠던 것처럼 추사는 노론 벽파의 적자 격 이었지만 분연히 온고지신과 실사구시를 설파한 실학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추사를 포함해 네 사람은 모두 생전에 자국 보다 외국에서 더 쳐줬고 자국은 오히려 핍박을 했다. 20여년의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 한지 꼬박 10년이 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도 변했지만 나도 변했다. 귀국 초기 나는 조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새록 아름답게 보여 그 공기를 함께 숨 쉬고 있음을 감사해 하면서 싱글벙글 하며 다녔다. 그때는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밀월기간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눈의 콩깍지가 하나둘 벗겨지면서 내면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남한산성 우거에 틀어 박혔다. 나의 그런 빗장을 연 이가 추사다.

‘추사 바라기’가 되어 추사를 따라하는 필자로서는 문득문득 추사가 살아 있다면, 추사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어떻게 이 현실들을 볼 것인가 생각해 보곤 한다.

한류스타 원조 김정희

문복도라는 문인화가 있다. 사각 망건을 쓴 중후한 선비에게 한 유생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림이다. 19세기 중엽, 청나라 유명 문인 정조경(程祖慶)이 추사 에게 보낸 그림. 발문은 이렇게 써있다. ‘완당 선생은 내가 비록 아직 그 얼굴을 대하지 못했으나 문장과 학문을 오랫동안 경모해 왔습니다. 이 그림을 그려 보내니 잘못되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수염을 치켜 흔들며 한바탕 웃어주십시오.’

그림에서 추사는 후덕한 대학자의 모습이고 정조경은 배움을 구하는 제자로 보여진다. 그런데 그림을 보낸 정조경은 실제 추사보다 연상이다. 추사는 24세 때인 1809년 친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10월8일 들어가 이듬해인 2월1일 돌아왔는데, 약 넉 달간의 연행(燕行)은 그를 제적 스타로 만들었다. 그는 당시 청나라의 최고 석학이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었고, 그곳의 일류 지식인들과 교유해 ‘추사 열풍’을 일으킨다. 두 스승과의 첫 만남 이후 추사는 지금으로 치면 통신 강의를 통해 그들로 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옹방강과 완원은 일생을 통해 단 며칠 동안 그를 봤음에도 철마다 해마다 경서를 수레 째 보내 주는 등 각별한 배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두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추사와 교류 했다. 정조경의 문복도에서 보듯 19세기 중엽 청나라 연경의 문인 학자들 가운데 추사의 휘호나 그림을 소장하지 못한 이는 행세를 할 수 없었단다.

추사가 제주 귀양 시절 그렸던 세한도가 어렵사리 연경에 도착하자 당대의 한다하는 학자 문인들이 앞 다투어 발문을 써 그를 칭송하고 평안을 기원 했던 것은 우리 앞에 현현해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으로 치면 한류스타만큼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우리 땅 조선보다는 청나라에서 더 쳐줬던 추사야말로 원조 한류스타라고 할 수 있다. 추사 이전에도 중국에서 활약했고 이름을 날린 우리 동국(신라 백제 고려)의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는 그 규모와 차원이 달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유학이라는 한중 양국의 공통 기반 위에 추사의 빼어난 재주와 이를 제대로 이끈 국내의 스승과 친지들, 또 이를 바로 보았던 청나라 대 학자들의 안목이 서로 맞아떨어진 이른바 시절인연의 도래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다. 한류스타 김정희의 등장에는 적지 않은 밑거름이 준비돼 있었던 것이다. 추사의 빼어난 재주를 제대로 이끈 이가 바로 첫 스승인 박제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을 알지 못했을 것이며 북학의 소양을 지니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분의 차이, 파당의 차이를 관계치 않고 서얼인 박제가에게 아들을 맡긴 추사의 부친 또한 혜안을 가진 통 넓은 이였다.

그런데 이런 바탕 위에 정작 꽃을 피우게 한 수훈갑은 바로 젊은 추사 자신의 끈기와 패기였다. 추사는 두 스승을 만나기 위해 패기있게 먼저 찾았고 끈기있게 기다렸다. 추사는 옹담계로부터 온고지신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전수받았고 완원으로부터는 실사구시의 북학을 배웠다. 그 후 추사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 길에 매진한다. 장년 이후 그가 겪게 되는 환난과 고초도 따져보면 타협을 모르는 고집 때문이었다. 추사가 뛰어난 점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해 그것들을 독창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그의 독특한 서체 추사체만 해도 그렇다. 구양순 조맹부 왕희지를 섭렵한 뒤 옹방강의 서체를 더해 그것을 뛰어넘은 서체가 바로 추사체다. 그래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그에게 열광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추사가 금석학에 대해 또 북학에 대해 예습하지 않고 두 스승을 만났더라면 그토록 어여쁨을 받을 수 있었을까. 지리의 시대, 문화의 시대, 지가(知價)와 정보의 시대인 요즈음, 한류의 발흥은 우리에게 자긍심과 함께 먹거리까지 제공할 수 있는 유망한 불루오션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시작해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까지 욱일승천 하던 한류의 기세가 주춤하다.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생각나면서 추사 김정희가 떠오른다. 추사가 거상 임상옥에게 그 휘호를 써 줘 임상옥이 인삼무역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실은 더 고증이 필요한 일화이지만. 기실 그간 한류의 발흥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우리의 에너지 특히 대중문화 쪽의 그것들이 집약돼 발현된 것이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물론, 한류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투자, IT산업의 발달, 하다못해 말 많은 조기유학 풍조며 노래방 문화까지 시절인연이 맞아 떨어진 것. 추사 김정희의 한류스타 등극이 그랬던 것처럼.

한류는 이제 그 상승 에너지를 다시 충전해야 한다. 백척의 벼랑 끝에서 한발 더 디뎌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한발이 바로 추사의 온고지신과 실사구시의 정신 그리고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그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각 방면에서 한류스타를 꿈꾸는 이 땅의 재주 있는 젊은이들에게 추사는 전범이 된다. 그의 천재성과 재주는 패기와 끈기,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개발한 독창성과 접목 되면서 빛을 발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류는 우리만의 한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실 있는 아시아의 한류, 지구촌의 한류가 돼야 한다. 그 내실은 보편성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독창이기에 우리는 베트남을 알아야 하고 캄보디아를 공부해야 하며 인도와 친해져야 하며 우즈베키스탄과 우크라이나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초대 한류스타 추사 김정희가 세한 연후에 송백이 푸름을 알았다고 갈파한 까닭이다. (계속)

필자 안동일은?

동국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시립대학 매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다녔고 뉴저지 페얼리 디킨슨 대학 국제관계센터의 연구교수를 지냈다. 198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미주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 동포 언론계서 활동했으며 서울 민주일보 주미특파원을 지냈다. 89년 이후 수차례 방북 취재에 나서 북한바로 알기에 일조 했다. 특히 89년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양의 행적을 서울 한겨레신문에 발표, 반향을 일으켰으며 입국 금지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후 통일염원 소설 ‘해빙’을 93년 7월에 발표했으며 이 소설은 그 후 서울의 SBS-TV에 의해 16부작 미니시리즈로 드라마화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뉴욕 동포방송 라디오 서울과 자매회사인 K-TV에서 뉴스와 시사프로를 7년 동안 진행했다. 2004년 영구 귀국, 개혁당 대변인, 국무총리실 전문위원으로 재직했고 2008년 이후 마천동 남한산성 산자락에서 창작에 전념, 두 권의 역사소설(장수왕의 나라, 북관대첩비)과 안중근 장군의 유해 문제를 다룬 ‘고독한 영웅’등을 썼다.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이르는 격변의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관계를 거시적으로 다룬 ‘소설 누루하치’를 구상하고 있으며 19세기 조선이 낳은 빼어난 예술가 추사 김정희에 천착해 있다.

3 comments

  1. 재기발랄한 기인으로 알려진 추사의 면모가 기실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지적 거장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인데 앞으로 그 세세한 사연들에 대한 기대를 해봅니다.

  2. ‘추사 김정희’라고 하면 글씨 잘 쓰는 위인 정도, 추사체외엔 그닥 떠오르는게 없었는데요,추사에 대해 여지껏 몰랐던 사실들을 접할 수있었네요. 한류와 김정희에 대해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될지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