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2) 세한도에서 배울 것들

세한도와 앙면문천(仰面問天)

남들과는 다른 추사 이야기를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세한도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 갈 수는 없겠다. 세한도야말로 추사와 나를 이어준 고리였고 빗장을 열고 이 연재를 시작하게 한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네 그루가 서 있고, 그 사이로 집 한 채가 보인다. 뻥 뚫린 둥근 창문처럼 생긴 구멍. 스산한 겨울 남도의 풍경을 수묵으로 그린, 그리 크지 않은 이 작품이 국보로까지 지정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귀국 초기 필자가 조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새록새록 아름답게 보여 감격하고 감사해 하면서 싱글벙글 하며 다녔다는 얘기는 전한 바 있다. 고국의 사회 인프라는 엄청나게 발전했고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의 매너도 업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내가 떠났던 무렵의 철조망과 최루가스 그리고 군홧발 소리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새 전화 설치며 가스 재연결도 전화 한 통화로 제깍 접수가 됐고 담당자들은 약속한 시간에 어김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가구며 가전제품 주문 배달도 제 시간에 이루어졌다. 상점이며 수퍼마켓 수납원들의 재빠른 손놀림은 긴 줄이 필요 없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매표원 아가씨들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인사 한마디는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조지워싱턴 다리 톨게이트의 고무장갑 낀 미국인의 퉁명과는 사뭇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의료보험은 미국의 그것과 천양지차였다. 거기가 지옥이라면 여기는 천국이라고 여겨졌다.

동사무소에서의 등초본 떼는 일은 어땠는가. 가족기록부와 주민등록 합쳐 2분 만에 발급되는 것 아닌가. 차량등록이나 운전면허증과 관련한 일 하나 보려면 하루를 꼬박 허비해야 했던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여의도 우리 집에 하룻밤 자겠다고 놀러 왔던 여대생 조카가 급한 연락을 받고 수유리 자기 집에 가야 하겠다고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전혀 망설임 없이 냉큼 일어나길래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지구상에 이런 나라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런 사회 인프라며 치안 등 외견은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발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의 콩깍지가 하나둘 벗겨지면서 내면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때는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밀월기간이었던 모양이다.

가슴속에 단도 품은 사람들

사람들이 모두 너무 급했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몰랐다. 천박한 호기심이 만연해 있었고 주체성은 상실돼 있었다. 남과 같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일류병, 명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난리들이다. 다락같이 오른 사교육비와 정상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용, 아파트 값 때문이라고 했다. 지역감정은 많이 완화된 듯했지만 또 다른 편가르기가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러니 갈등이 만연했고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이어졌고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공직자 후보를 고르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소통과 상생은 계속 얘기되지만 구두선에 불과한 듯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진실과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바보취급 당하고 따돌림받는 것 같은 세태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귀국초기 한 친구가 “이곳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단도 하나씩 감추고 있다”고 했을 때 허투루 들었는데 그럴 게 아니었다.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남한산성 우거에 틀어 박혔다. 나의 그런 빗장을 연 이가 추사였고 그 열쇠가 바로 세한도였다.

처음엔 건방지게도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그림을 보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 5년째 접어드는 해 그렸는데 이때가 추사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혹독하고 엄혹한 시기였다. 방송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성스레 수발하던 아내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찾는 이도 거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세세히 살펴보니 세한도에는 역경을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은 의지와 눈부신 희망이 있었다. 그림에서 허름해 보이는 초옥은 완당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갈필로 반듯하게 이끌어간 묵선은 조금도 허둥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고 단정하다. 외양은 조촐할지언정 속내는 도도하다. 완당이란 튼튼한 집이라는 뜻 아닌가. 남들이 보건 안 보건, 미워하건 배척하건 아랑곳 않고, 이 집에서 스스로가 지켜나갈 길을 묵묵히 걷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림에는 곤경에 처한 스승을 생각해주는 제자며 잊지 않고 있는 친지들에 대한 믿음과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집 앞에 우뚝 선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 그 뿌리는 땅에 굳게 박혀 있고, 한 줄기는 하늘로 솟았는데 또 한 줄기가 가로로 길게 뻗어 차양처럼 집을 감싸 안고 있다. 윤곽만 겨우 지닌 집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저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인 것이다. 먼 곳 이파리는 청나라 문인들.

왼편에 선 두 그루 측백나무는 줄기가 곧고 가지들도 위쪽으로 팔을 쳐들고 있다. 이파리까지 모두 짧은 수직선이어서 상승감은 더욱 강조된다. 완당은 이 나무들에서 희망을 그렸던 것이다. 아마도 두 아들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 세한도를 그린 이후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빗장을 열고 동리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곳 촌부들과 왕래도 하고, 추사체를 개발해 낸 것도 이 시기였다.

하늘도 괴롭다는데

추사 김정희야말로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기에 한번 빠져 들면 헤어나지 못한다 하더니 그 말이 맞았다. 추사와 세한도는 나를 냉소와 나태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추사의 유묵을 모사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 그의 서화와 저술들을 연신 살피고 틈나면 돌과 전각 칼을 꺼내 지인들에게 줄 인장 낙관을 새기곤 한다. 내 손은 먹물에 검게 물들어 있고 칼날에 베인 상처투성이지만 이 ‘추사바라기’는 신명이 난다. 아침 잠이 유난히 많은 아내는 예전의 난데없는 바이올린 소리보다 훨씬 좋다며 적극 환영이다. 추사는 가정의 행복도 가져다 준 셈이다.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낙지자(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라고 했던가. 추사 따르기는 다 신명나는데 그 중 더 신나는 일의 하나가 전각이다. 돌은 튼튼하다. 하지만 칼은 그보다 더 강하다. 돌에 글자를 새기는 전각은 마음을 새기는 일이다.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라는 책이 있다. 중국 명나라 말엽 정호라는 이가 유명 전각가들이 옛 경전에서 좋은 글귀를 모아 새긴 인장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 내용에는 금과옥조와 같은 글귀가 많다. 인보(印譜)라는 것이 필사가 불가하기에 귀한 책이기는 하나 모르긴 해도 전각 매니아였던 추사도 이 책을 수장 애독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추사의 호가 그토록 많은 까닭은 그가 전각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조선으로 들여와 소개한 이가 실학자 이덕무이고 그 서문을 추사의 스승인 박제가가 썼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오늘날 총명함이 열리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글을 무덤덤하게 보는 병통 때문”이라고 일갈하면서 “이 인보의 주옥같은 글들은 시원스러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할 수 있고 우뚝하여 여린 자를 굳세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인보 가운데 가슴을 치는 명문이 하나 있다. 앙면문천 천역고(仰面問天 天亦苦), 얼굴을 들어 하늘에게 물어보니 하늘 또한 괴롭다 하네. 모두를 괴롭다고 하는 시절이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 말에서 희망을 본다. 하늘도 괴롭다는데 이깟 내 괴로움쯤이야. 그리고 하늘도 괴롭다는데 내 괴로움은 내가 극복해야지. 세한도를 그리던 그 때, 추사의 심정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계속)

2 comments

  1. 세한도에서 희망을 보신 님 쫌 짱인듯^^ 그러나 미술치료학의 관점으로 해석한 세한도로 그 안의 추사를 바라본다면 또 다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나올것 같습니다. 프로이드가 만난 추사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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