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 5] 문자향과 회사후소(繪事後素)

추사의 불이 선란. 추사의 남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추사의 불이 선란. 추사의 남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추사가 금과옥조처럼 사용하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와 책에서 나오는 기운을 이른다. 이 말은 추사가 제주 유배 중에 자신의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을 그리는 법을 설명하면서 쓴 말이다. 추사의 편지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후에야 얻을 수 있다. 난을 치면서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의 무리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추사는 조희룡이라는 특정인과 그의 주변을 거명하면서 혹독하게 비난, 폄훼한다. 추사보다 한두 살 어리기는 하지만 거의 동년배인 우봉 조희룡은 평민 출신으로 당시 조선화단의 한축을 이루는 이였다. 추사의 화풍이 중국 남종화의 맥을 잇고 있다면 벽오사라 불리던 우봉과 그 주변 화인들은 조선인의 정서에 맞는 문인화, 즉 ‘조선문인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 차가 추사를 화나게 했고 이 ‘편지사건’의 핵심 원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우봉도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된 셈인지 추사의 혹독한 비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우봉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아들 상우가 경솔했다고 말했단다. 추사야 원래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사람이라 그럴 만하지만 그 편지를 공개해서 파문을 일으킨 상우가 잘못한 것으로 크게 괘념치 않는다고 했다.

실제 추사와 우봉은 추사의 방송 귀경 이후 서로 절친하게 지내면서 교류했는데 평자들은 조희룡을 추사의 제자로 분류한다. 추사가 우봉의 화풍을 어느 정도 용인, 이해해 줬지만 추사의 시 서 화 삼절이 당시의 화단을 통일했다는 말과 통한다. 추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애통해 하면서 절절한 글을 쓴 이가 우봉 조희룡이다.

이처럼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는 생각처럼 고답적이고 완고한 것은 아니었다. 동국 진체를 개발해 조선 서예사의 획을 그었던 원교 이광사의 글이며 남도 향촌의 창암 이삼만의 글을 놓고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제주 유배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렸던 추사가 원교의 대웅전 현판 글씨를 당장 떼어내라고 일갈하면서 자신이 새로 써줬던 일화와 주변에서는 알아주던 창암의 면전에서 “영감께서는 글씨로 시골에서 밥술은 떠먹겠소” 하며 폄하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9년 유배가 끝나고 귀경하면서 추사가 대흥사에 다시 들러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라고 했고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창암의 묘소에 들러 절절한 참배를 올렸다는 일화는 더 유명하다. 그때 피었던 향기가 바로 문자향 아닐까. 형식적으로 본다면 ‘문자향’이란 고전서의 임서와 고비(古碑)의 문자연구를 통해서 우러나오는 심미의식을 말하고, ‘서권기’란 많은 독서와 학문을 통해서 형성되는 지성과 인품이 예술적 통찰로 승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는 단지 은은히 풍기는 묵향(墨香)이나 서가에 꽂힌 서책의 위엄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금석학자답게 유난히 전거(典據)를 좋아했던 추사지만 이 말만큼은 또렷한 전거가 없다. 중국 남종화단에서 그림에는 반드시 묵향과 독서의 교양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정도가 그 전거라고 할 수 있다. 남종화는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수묵과 옅은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시정적이며 사의적(寫意的)인 측면을 중시해 그린 그림으로, 화려한 채색의 북종화와 대비된다.

중국에서 남종화는 일세의 거봉 동기창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에 힘입어 명 말기부터 문인화가들뿐 아니라 직업화가들 에게까지 파급되었다. 조선에는 이같이 정형화된 남종화풍이 17세기 전반경 유입되어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적인 화풍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직업 화가들도 남종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면서 점차 형식화되었다. 이러한 형식화 현상에 대해 추사는 남종화 본래의 문인화적 이념과 정신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면서 새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국의 남종화는 일제강점기에도 큰 세력을 이뤘고, 해방 후에는 주로 호남지방 화단을 중심으로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 남종화가 거의 멸실된 것과 비교하면 큰 대비를 이룬다. 바로 추사의 애제자로 조희룡도 극구 칭찬 했던 소치 허유가 남종화의 맥을 잇는 한국화의 비조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분명 향기와 기운을 이르지만 냄새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모름지기 1만권의 독서량이 있어야 문자향이 피어나고 서권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려면 먼저 그 사람됨이 바탕에서 우러나야 한다. 사람됨이 바탕에 없이 독서와 기량만 쌓이면 그것이 때로는 문자향이 아니라 문자욕(慾)이 될 수 있고 서권기가 아니라 서권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사는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古高雅)한 뜻이 없으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의 가르침을 다시 강조했던 것이다. 공자의 회사후소는 추사의 문자향과 일맥상통이다. 회사후소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말로,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말한다. 이 말은 논어 팔일(八佾)편에 나온다.

자하가 스승에게 물었다.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 소박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

“예는 나중입니까?”

“나를 일으키는 자는 그대로다.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공자의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온통 실속 없는 형식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 것. 인간 생활에 필요한 예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인간됨됨이가 선결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추사의 삶에서 확인했듯이 진정한 의미의 ‘문자향 서권기’는 각고의 참구 끝에 지식의 유한성과 생명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삶에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자만과 아집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놓아버리는 순간 생기는 마음의 공간을 갖게 되고 그것에서 느껴지는 향기인 것이다. 이 공간은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자유의 공간이며, 이 향기는 이 세상 최고의 명품 향기다.

문자향 서권기는 추사의 금과옥조이면서 형식과 겉치레에 빠져 본질은 망각하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산 교훈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통찰에 이르는 독서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우봉 조희룡의 난. 추사는 처음에 서권기가 없다고 난이 아니라고 했다.

우봉 조희룡의 난. 추사는 처음에 서권기가 없다고 난이 아니라고 했다.

One comment

  1. 추사는 반성을 통해 원숙미를 더해가는 반면 조희룡은 원래가 호방한 수용기를 가졌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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