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에게 길을 묻다](4) 다시 ‘문자향 서권기’를 생각하며
추사 김정희가 추사체라는 독특한 체를 개발한 명필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 그리고 철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인물이 추사 김정희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한도라는 이병주 선생의 수필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에 우리 또래 사람들은 세한도와 완당을 그 시절부터 알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 시절 어린이 위인전에 추사는 빠져 있었다.
ㄱ사에서 두툼한 15권으로 발간한 어린이 위인전이 가장 널리 읽혀진 전집인데 거기에는 추사가 없다. 그 무렵의 기준에서 보면 그의 생애에서 초등학생들이 본받아야 할 애국적 특징이 없었다고 평가됐던 모양이다.
지금도 한국화와 한국 서예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아예 추사를 계보에서 빼 버리는 이들도 꽤 있다. 그의 친중 성향을 문제 삼아 그는 중국의 예술가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살아서도 그랬지만 죽어서도 적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린이 추사 위인전도 몇 권이나 발간됐고 그를 다룬 소설, 논평집 그리고 학술논문이 줄을 잇고 있다.
무엇보다 그를 기념하고 그의 예술 작품을 기리는 박물관 기념관이 전국에 세 곳이나 건립돼 있다는 사실은 그의 찬란한 복권을 웅변하고 있다. 그의 고향인 예산, 그의 유배지였던 제주, 그리고 그가 생을 마친 과천에 있는 기념관 박물관이 모두 꽤 알찬 규모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하나밖에 없는 진본을 전시 할 수 없기에 소장품들이 대부분 사본이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처럼 낭중지추 라고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 나오기 마련이다.
생전에 그를 죽음으로 까지 이르게 할 만큼 모함했던 적들도 항상 ‘재주는 뛰어 날지 모르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그를 부처하는 왕명에 조차 그의 뛰어난 재주를 언급하면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재주만을 지녔던 사람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인간 중심의 이성적 사유와 실천을 행했던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 시절 드물게 국제적 안목을 지닌 이였고 옳은 정치를 실현하고자 애 썼던 경세가이기도 했다. 독서의 유용함을 일찍부터 알아 실천했고 토론과 논쟁이 지적 사유를 업그레이드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이였다.
추사의 생전에도 그를 더 알아준 곳이 외국인 청나라였다면 지난 20세기 초반 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그의 복권에 적극 나서 그에 관한 논문을 쓰고 그의 유묵과 작품을 널리 수집한 이는 일본인 학자였다. 국보인 세한도도 후지츠카 박사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을 뻔 했던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추사는 두 반세기전에 아시아인으로 살았던 국제적 인물 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 나아가 지구촌의 문제는 복잡 다단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인문정신의 결여 내지는 결핍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빠름과 실용 그리고 물질에 경도 돼 정작 인간은 빠져 있는 그런 우를 모두들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추사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은 물질주의가 팽배하면 팽배 질수록 더 절실해지는 것이다
한류가 발전을 위해 백척의 벼랑 끝 에서 한발 더 디뎌 그 상승 에너지를 다시 충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한 발이 바로 추사의 온고지신과 실사구시의 정신 그리고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라고 한바 있다.
실은 현대 불교사의 우뚝 선 거봉 탄허 스님의 일갈이다. 1970년대 말 나는 그분의 제자였던 멱정 여익구 형과 함께 서울 진관사 후원채 툇마루에서 큰스님과 꽤 오래 담소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추사 매니아 탄허스님
그때 스님은 글씨를 쓰고 계셨는데 당시 내 안목으로는 하릴 없는 추사의 글씨였다.
그 글들은 지금도 진관사 법당의 주련으로 걸려 있다. 그 무렵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에 골몰해 있었던 우리는 타종교의 지도자처럼 현실에 대해 한 마디 하셔야 하는 치열한 순간에 한가하게 서도냐 하는 불만을 애둘러서 내비쳤었다. 당돌하게 “하화중생은 어떻게 됩니까?”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뜬금없이 “자네들 문자향 서권기라고 들어봤는가?”하시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다고 하자 클래식 정신, 인문주의 정신이라고 요약해 일러 주시면서 이어 한반도의 기, 그리고 문화 얘기를 하셨다.
스님은 한반도의 기(氣)가 승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곧 세계 문제의 해결이며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게 돼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모든 종교가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세상으로 들어나는 문화의 시대가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화두를 던져 주시듯 그렇기에 모든 이가 클래식 정신으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날 스님은 이삼십 년쯤 뒤에는 우리의 문화가 세계를 압도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광장에서, 파리의 에펠탑 광장에서 한국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솔직히 뜬구름 같은 덕담쯤으로 흘려들었었다.
그랬는데 싸이가 약진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로 구현되지 않았던가.
스님의 예지력이야 입적하신 후 다들 익히 알게 되어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개인적 일화와 기억은 나도 모르게 한류와 그 발흥에 관한 한, 나 스스로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는 선각자쯤으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히 따져 보니 스님도 추사 메니아였다.
서예계에서 스님의 글씨가 나름대로 또 한번 변모한 추사체 라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일. 그리고 스님 또한 전각을 좋아 하셨던 것이다. 지난해 초여름 국립박물관에서 스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해 서예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스님의 낙관 인장 수십 점이 함께 전시됐었다. 추사의 인장처럼 물론 몇몇은 장인이 만들었겠지만 손때 묻은 소박한 인장들은 당신들이 세상과 인생의 고민을 담아 손수 판 것들이다.
그래서 문자향 서권기, 백척간두 진일보는 큰스님의 말씀을 빌어 추사가 이 땅의 고민하는 사람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고언이었다고 나는 결론짓는다.
운세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그리고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계속)
탄허스님의 일화가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