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세월호 상처 보듬어 주세요”
고통받는 이들 눈물 닦아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4년 12월 30일 저녁의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크로마뇬(Cromanon)이라는 나이트클럽은 연말대목을 맞아 즐거운 분위가 넘쳤습니다. 클럽은 관행대로 정원을 초과해 사람들을 입장시켰고 출입 통제를 위해 비상구는 잠가 두었습니다. 클럽 안의 젊은이들은 카에헤로 밴드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클럽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흔히 그렇듯이 클럽 건물은 화재를 대비해서 적절한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화재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 193명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할 때 마다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교황님께서도 익히 아시는 세월호 침몰 참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크로마뇬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부실과 부패에 더하여 무능과 무책임까지 더해진 최악의 사고였습니다. 사고가 난 후 한 동안 방송과 언론에서는 정말 다양한 원인 분석과 논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승객들을 버리고 도주한 선원들을 악마로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자문을 해보면 우리는 다시 ‘도대체 왜?’를 묻게 됩니다. 사건이 벌어진지 두 달여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묻습니다. 처참한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는 세월호의 참사와 교훈을 잊어가고 있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교훈 잊어가는 현실 안타까워
교황님은 2009년 12월 3일 크로마뇬 5주기를 맞아 추도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성직자에게는 선한 가치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추도식에서 교황님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허영에 가득 찬 부패한 도시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속도위반으로 경찰에 적발되었을 때 운전자가 처음 듣는 말은 “얼마에 해드릴까요?”라고 할 정도로 부패와 부정은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피아 관피아라는 말이 드러내듯이 자본과 관료의 결탁은 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에 이권과 뇌물의 연결고리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는 선한 양심을 부패시키는 성향이 있나봅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 하고 문제가 생겨도 당장 눈앞의 위기만을 모면하려할 뿐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는 언제나 자신을 제일 먼저 생각하려는 성향이 도사리고 있지요.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려는 자기중심적 성향, 바로 그것이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추도식에서 자기중심주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선악의 욕망이 모두 존재합니다.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가 선함을 따라 살려고 하는가 아니면 악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은 매 순간의 선택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줍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제일 먼저 생각하려는 성향,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본능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우선주의를 강화시키는 자극을 받습니다. 내 안의 욕구가 그렇고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고 시스템이 그렇고 제도가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를 충동합니다. 내 안의 이기주의와 사회의 무한 경쟁 시스템이 만나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욕구의 절제는 거추장스러울 뿐 우리는 더욱 열심히 탐욕을 추구하고 주변과 사회는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시켜줍니다. 사기꾼이 사기를 당하는 사람의 욕심을 노리듯이 탐욕적인 사회는 우리 안의 이기적인 성향을 노립니다. 그래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버리고 제 한 목숨 살리고자 도주한 선원들의 행동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과 구조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기주의 남에게 상처주고 자신까지 해쳐
우리 자신이 그 일원이기도 한 부패한 사회에서 우리는 늘 시험에 빠집니다. 선악의 선택이라는 책임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각 사람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미혹됨으로 인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 즉 이기적인 욕망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가치 판단을 잃고 총명한 판단력을 그르치게 되고, 마음을 흐리게 되어 자기 손으로 수고하기 보다는 편법으로 쉽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쪽과 저쪽에서 모두 단물만 빼먹으려는 기회주의에 빠지고 양손에 떡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욕심에 흐려져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영국의 여류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자전 에세이에서 ‘모든 것을 통해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생각을 얻었는데, 자기본위의 이기주의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기주의만큼 자신을 잔인하게 해치는 것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기주의만큼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또한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모든 실패는 이런 유형의 인물에서 비롯된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구에만 갇혀 있어 다른 사람의 삶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무관심이야말로 모든 실패와 범죄의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이 가지고 누리기 위해서, 없는 자들은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 더욱 자신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중심주의에 빠져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빚어낸 원인입니다. 또한 크로마뇬의 비극을 벌어지게 한 원인일 겁니다. 교황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