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복음서 멀어지는 대형교회가 개혁대상

생명과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생각하며

몇 달 전 가톨릭 교인인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교황이 암살될 위험이 있으니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인 6월21일 교황은 “마피아처럼 악의 길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느님과 교감하지 않는다”며 “마피아 단원들은 파문됐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피묻은 돈은 천국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발언에 이어 마피아와의 결연한 척결을 선포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피아와의 전쟁’에 나선 것은 교황청과 마피아 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다. 교황청과 마피아의 결탁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과정에서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실 이 고리를 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3개월째인 지난해 6월 바티칸은행 개혁위원회를 설치해 마피아 자금유입을 차단하고 이탈리아 경찰 협조로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발본색원에 나섰다.

가톨릭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고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교황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 아니 개신교 목사가 어떻게 가톨릭 교황을 위해 기도하냐고 묻는 개신교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개신교는 1517년 종교개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다가온다. 솔직히 개신교 대형교회들을 보면 복음의 본질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개혁을 보며 이제는 개신교가 바로 그 개혁대상의 중심에 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습’ 하나만으로도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음에도 너무나 당당한 그 태도에 놀랍기 그지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자”고, “예수님을 우리의 ‘진부한 도식’ 안에 가두지 말자”고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목적이고 선교적인 회개’가 필요하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뜻과 현재의 복음화 요구에 더욱 충실하도록 ‘교황직의 전환’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세습을 정당화하려는 우리 개신교의 교권과는 너무나 다르다. 부끄럽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을 읽다보면 내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의 성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가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예수는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해 오신다. 아니 이들이 우리가 영접해야 할 예수다. 프란치스코는 종교적으로 ‘교회 안에 갇힌 진부한 예수’를 해방시켰다. 그는 “어느 누구도 종교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개인 생활의 내적 성역으로 치부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며 예수를 교회 밖의 가난과 차별, 폭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로 확장시켰다. 그는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사회학적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라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교회 밖으로’ 확장시켰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의 타락에 반박하는 95개조항을 발표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세습 정당화하려는 개신교 자성 필요

이런 관점에서 8월의 교황 방한을 두고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은 잔치가 아니라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 말은 참으로 가슴을 울린다. 강 주교는 교황이 지난해 7월 아프리카 난민수용소가 있는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고, 지난 5월 중동 순방 때는 요르단 국왕 만찬을 사양하고 시리아 난민 교회를 찾은 일을 사례로 들었다.

성서의 주제는 두 단어로 요약하면 ‘생명과 평화’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삶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모두를 걸고 있다. 교황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가난한 이들을 침묵하게 하거나 유화시키려는 거짓 화해의 사도들에 맞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는 억압된 평화에 대한 저항이다. 예수의 행적도 몸으로 부딪쳤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 대한 저항의 하나였다. 이 평화의 밑바닥에는 물론 생명에 대한 한없는 존중이 있다는 것을 교황은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 생명을 없앰으로써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창조물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호소하면서 “깨지기 쉬운 이 세상을 지키도록 우리는 부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교회의 사목활동은 당연히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개방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단지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그 자체가 흩어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단지 빈곤·폭력·차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교회로 모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이들을 찾아가는 ‘흩어지는 교회’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차라리 거리로 뛰쳐 나와 상처받은 교회를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중심이 되려고 걱정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거듭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생각하니 다가오는 성서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 4장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의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하였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가시 돋친 말을 한다. 오랜 역사의 질곡 속에서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인즉, 당신은 ‘유대 사람’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거다. 지방색(地方色)이 완연하다. 게다가, 당신은 ‘남자’고 나는 ‘여자’란다. 성(性)의 구별 또한 뚜렷하다. 그러니까, 유대 남자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청할 수 있느냐는 거다.

우리 세대의 남과 북, 동서의 문제가 심각하다. 여기엔 개신교의 배타성도 한몫한다. 유대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와 손을 잡고 평화를 함께 논하는 교황의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부럽기도 하다.
교황의 방한, 나에게는 기대가 크다. 그 기대는 이 나라 아픔의 중심에 분단과 지역감정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목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교황의 진보적 사목이 단지 홍보에 그치지 않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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