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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진리와 자유는 하나다”
‘항상 있을 것들’의 목록에 정의의 자리는 없다. 도덕이나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정의, 도덕, 신념, 이데올로기 저 너머에 사랑이 있을 따름이다. 광복 80주년을 지내면서, 진실과 자유를 품은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고요히 머리 숙인다. 사랑이 으뜸이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머릿돌.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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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우근 칼럼] 역사가 남긴 냉엄한 교훈…동맹을 버린 나라들의 몰락
유비의 부름을 받은 제갈공명은 위·오·촉(魏吳蜀) 세 나라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역설한다. 촉한(蜀漢)과 동오(東吳)의 동맹으로 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공명의 구상은 적벽대전에서 큰 위력을 나타냈다. . 그러나 형주의 영유권을 둘러싼 촉·오의 전쟁, 관우의 죽음, 유비의 패전 등으로 촉·오동맹이 허물어지자, 결국 공명은 촉나라 단독으로 위 정벌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죽는다. 촉·오동맹이 깨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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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우근 칼럼] 나를 위한 기도 vs 공동체를 위한 기도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에는 ‘내 기도’가 없다. 모두 ‘우리 기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남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예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가 아니다. 공동체의 기도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고 증언한다.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동일시한 야베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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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우근 칼럼] 정치화된 사법, 누구를 위해 문을 여는가
카프카 <소송>의 ‘성당에서’ 장에 삽입된 ‘법 앞에서(Vor dem Gesetz)’를 형상화한 삽화 한 시골 사내가 법(法)의 문 앞에 도착한다. 그는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덩치 큰 문지기는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사내는 법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문지기의 단호한 태도에 겁을 먹고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한다. 사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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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우근 칼럼] 참회에서 부활로: 아우구스티누스‧루소‧톨스토이 그리고 다윗‧욥‧사도바울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Augustinus_Confessiones 아우구스티누스‧루소‧톨스토이의 <고백록>을 ‘3대 참회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그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던 죄의 행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고백록> 제11편에서 시간에 대해 깊은 철학적‧신학적 성찰을 펼친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는 ‘객관적 시간론’이 지배적이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과거의 기억‧현재의 직관‧미래의 기대’라는 인간 내부의 정신작용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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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우근 칼럼] “민주주의 생명은 권력의 분립, 사법의 철저한 독립에 있다”
바이런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법 때문에 망한다.” 국민을 ‘순수한 대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두 계급으로 나누는 정치집단은 엘리트 계층에 대한 대중의 원초적 분노, 경제적 사회적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본능적 증오를 정치의 밑거름으로 삼는 반면에, 국민을 ‘미개한 대중’과 ‘현명한 엘리트’의 두 계층으로 나누는 정치세력은 미개한 대중을 지도 계몽하는 엘리트의 자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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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우근 칼럼] 하늘의 계명, 땅의 사랑: 플라톤의 ‘손가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
라파엘로 작 ‘아테네학당’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 KOREA 인권위원장]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서양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상상화다. 그림의 왼쪽에는 플라톤을 비롯한 관념적 이상주의 철학자들이, 오른쪽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현실적 경험주의 사상가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중심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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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현실 속에 과연 존재할까?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민(民)이라는 한자는 원래 ‘뾰족한 꼬챙이로 한쪽 눈을 찔린 사람’을 뜻하는 갑골문의 상형문자로, 고대에는 전쟁포로나 노예 또는 죄수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포로나 죄수, 노예의 한쪽 눈을 찔러 저항력을 빼앗고 노동력은 남겨둬 강제노역의 수단으로 삼았던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평민(平民)이라는 뜻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포로, 노예, 죄수를 다스리는 사람이 인(人)이다. 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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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Amo ergo sum)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어 “이웃을 찾지 말고, 스스로 이웃이 되라“고 가르쳤다. 거룩한 제사장도, 종교적인 레위인도 아니고 왜 하필 천대받는 이방의 사마리아인일까? 사랑은 신성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어둡고 고통스럽고 이질적인 인간관계에서 이뤄가는 일상의 삶이라는 뜻 아닐까?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The Good Samari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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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대선 사흘 앞둔 한국인, 채플린 명언의 예외 될 수 있을까?
찰리 채플린 “개인은 현명하다. 그러나 군중은 머리 없는 괴수, 거대하고 야수 같은 바보가 되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회사를 세운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세계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인 선진국이었다. 그 네덜란드에서 튤립 투기라는 매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희귀한 색깔의 튤립 꽃을 부자들에게 팔면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는 소문이 떠돌자 가난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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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미리엘 신부와 장발장, 그리고 새 교황 레오 14세
미리엘 신부와 장발장, 그리고 경관 <레 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는 생면부지의 전과자 장발장을 ‘이름도 묻지 않고’ 사제관 안으로 받아들인다. 장발장은 사제관의 은그릇을 훔치지만, 신부는 경찰관에게 “은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그에게 주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법정에서라면 위증죄요, 범죄자를 숨긴 범인은닉죄다. 성당 소유물인 은그릇과 은촛대를 마치 자기 물건인 것처럼 장발장에게 내어준 것도 업무상횡령죄에 해당한다.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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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우근 칼럼] 잔인한 달, 4월이 가고 있다
모차르트의 무덤 안에는 그의 유골이 없다.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무덤 없는 모차르트… 죽어서도 23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숨결을 내뿜는 예술혼(藝術魂)에게 무슨 무덤이 필요할까? 오스트리아 빈(Wien)의 모차르트 무덤은 빈 무덤, 가묘(假墓)다. 지금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 그의 빈 무덤처럼…(본문에서) 사진은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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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윤석열 탄핵 후 다시 읽는 트루먼 명패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전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명패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모든 정책 결정에 대통령 자신이 최종적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불리한 일엔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대통령은 책임윤리가 결핍된 비겁한 지도자다. 지도자의 으뜸가는 덕목은 신뢰의 인격이다. 무책임한 대통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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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막장정치 바로잡을 책임은 결국 국민 몫
단테는 <신곡>(神曲)의 지옥문 위에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글귀를 써놓았는데, 일본의 판사였던 세기 히로시(瀬木比呂志)는 <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책에서 일본 사법부의 치부(恥部)를 거침없이 파헤쳤다.(본문에서) 혼돈이다. 어마어마한 산불이 드넓은 산야(山野)를 삽시간에 집어삼키더니, 칠흑 같은 정치적 혼란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찬반 시위가 수개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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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우근 칼럼]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신의 은총이 숨어 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성전은 우뚝 솟은 건물이 아니다. 엄숙하게 차린 제단이 아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몸으로 만나는 영성(靈性)…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몸의 신앙을 이렇게 풀어낸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의 일상에 신의 은총이 숨어 있다.” 사진은 칼 라너(Karl Rahner)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KOREA 인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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