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행위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다.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이 필요하다.” 힌두교 신자이면서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밝힌 간디의 말이다. 크리스천은 기도의 진실성을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끝맺음으로 나타낸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요한복음 14:13).
유대인들에게 ‘이름’(שֵׁם)은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름은 그것이 지시하는 존재의 본질을 가리킨다. 예수의 이름은 무슨 소원이든 척척 이뤄주는 신통한 주문(呪文)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그의 전인격적 실존 곧 탄생, 말씀, 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의 삶 전체를 나타낸다.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인 예수(헬라어 예수스 Ἰησοῦς / 히브리어 여호수아 יהושע․ 호세아 הושע)는 ‘야훼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크리스천의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성령 안에서’ 아뢰는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인 ‘진리’ 자체요,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며, 성령은 기도하는 이의 마음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이라는 예수의 전인격이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적 현실로 구체화된다. 초월자인 신에게로 나아가는 기도는 그 자체가 일상(日常)을 넘어선 초월의 행위다.
종교감정론(宗敎感情論)을 편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초월자인 신 존재를 내부적으로 또다시 구별하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헤겔(G. Hegel)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자인 신은 영원 즉 ‘세계 밖’(聖父의 나라)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분리하고 특수화하여 ‘세계 안’(聖子의 나라)에서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고, ‘정신적 공동체'(聖靈의 나라) 안에서 사랑의 영(靈)으로 보편자와 특수자를 하나로 묶어준다.”고 주장했다.
전통신학으로부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고유성을 왜곡했다고 비판받는 헤겔의 주장은 유일신론이라기보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 나름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크리스천들은 왜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을까? 죄와 욕망으로 더렵혀진 나의 실존, 초월자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인 나의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고 약속했다. 구약성서의 큰 주제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고 한다면, 신약성서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라고 할 수 있겠다.
사도바울은 크리스천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로마서 12:5)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에수의 이름으로 아뢰는 기도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갈라디아 2:20) 거하는’ 존재론적 연합의 고백이 된다. 그 연합 안에서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하나로 만나 초월의 문을 두드린다.
하나님은 이름 없이 ‘스스로 있는 분'(출애굽기 3:14 / “I am who I am”)이다. 그 히브리어 원문은 미완료형이다(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영원한 존재를 네 개의 닿소리인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 יהוה 야훼)로 표기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입으로 발음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낸다(요한복음 17:6).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이 다가온다(요한복음 14:26).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자 또 성령의 이름, 곧 삼위일체의 이름이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는 ‘기도자의 마음을 살핌’으로, 성자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에 참여한다(로마서 8:26,27, 빌립보서 2:9).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다(not yet)’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종말론적 상황을 일깨우는 삼위일체의 현존(現存)이다.
기도는 초월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입술의 언어가 아니다. 삶의 모든 길을 그리스도와 동행하겠다는 실존의 고백이다. 애끓는 소원을 기도로 아뢸 수 있고, 또 아뢰야 마땅하다. 그러나 권력이나 부귀영화 따위의 현세적 성취욕구를 기도로 이뤄보겠다는 이기심의 넋두리는 예수의 이름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욕망의 넋두리를 기도에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였다(마가복음 14:36). 예수의 이름은 기도를 끝마치는 에필로그가 아니다. 소원성취를 비는 일상적 종교언어도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일상을 넘어 실존의 자리로, 종교를 넘어 신앙의 영역으로 이끄는 ‘거듭남에로의 부름’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 그 초월의 자리로 부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