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이 슬프지 않으려면, 감성의 사랑을 넘어 책임의 사랑이 무르익어야 한다“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달은 아마도 5월 아닐까. 늦봄과 이른 여름이 만나는 5월은 어린이와 어버이와 스승이 함께 만나는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만나는 자리에는 더없이 소중한 아름다움이 녹아든다. 한 달 전 4월이 잔인한 달이었기에 가정의 달 5월은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시인 엘리엇이 읊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풀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황무지’ <The Wasteland>)
4·19 학생혁명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4월은 한겨울보다 더 으스스했다. 아, 그리고 12년 전 4월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孟骨水道)의 세월호…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으로 4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을 가라앉는 배에 그대로 남겨둔 채 남몰래 전용통로로 빠져나온 선장이 한가롭게 젖은 지폐나 말리고 앉아 있을 때, 스물두 살의 임시승무원 박지영은 갈팡질팡하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대피시키느라 동분서주하다가 침몰하는 배와 함께 바닷물 속에 잠겼다.
왜 탈출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선장도 항해사도 기관사도 모두 헌신짝처럼 내던진 생명윤리․책임윤리․직업윤리가 임시승무원 여대생의 입에서 울려 나온 것이다. 세월호의 천사 박지영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불길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 환하게 밝히고 있다. 가슴 찢는 4월의 기억이다.
그렇지만 잔인한 4월 못지않게 가정의 달 5월도 모질고 가슴 저미는 기억을 우리 역사에 새겨놓았다. 5·16은 군사쿠데타와 구국의 혁명 사이에서 여태껏 방황하고 있다. 5·18의 흥건한 핏자국은 역사인식의 갈등 탓에 아직도 마를 틈이 없다. 5월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도 싸늘한 바람이 스친다.
그렇지만 5월이 슬픈 것은 그늘진 과거사의 기억 때문만이 아니다. 4월이 잔인한 까닭은 메마르고 척박한 황무지에 봄의 햇살이 다가와 죽은 땅에서 꽃을 피우라고, 새싹을 틔워내라고 채근해대기 때문일 게다. 아무리 채근해도 희망의 새싹을 틔우거나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없다면, 5월은 4월보다 더 잔인한 달, 따뜻해서 더 서러운 모순의 계절일 터이다.

가정의 달은 왜 하필 5월의 봄철인가. 적잖은 가정들이 부모의 이혼, 자녀의 가출 등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슬픈 시절인데… “왕국을 다스리는 것보다 가정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렵다.” <수상록(隨想錄)>을 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의 탄식이다. 아파트가 늘어나 하우스리스(houseless)는 줄었지만, 가정이 깨어져 거리를 방황하는 홈리스(homeless)는 줄지 않은 듯하다. 집은 늘어나고, 가정은 사라져간다.
가정은 개인의 자아(自我)가 확장된 자리이자 사회의 출발점이다. 자아의 실현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사회에서 결실되고, 그 결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은 도덕교육의 터전’이라고 못 박았다. 올바른 성품과 반듯한 삶의 자세는 교사의 입이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부모의 품에서부터 배워 가는 것이다. 저마다 왕자로, 공주로 홀로 자라난 아이들이 인간관계를 바르게 형성해 가기 어려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어머님은 속삭이는 조국/ 속삭이는 고향…/ 가득히 이끌어 주시는/ 속삭이는 종교”라고 읊었다(조병화 ‘어머니’).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죽음의 자리에서 맨 나중에 헤어지는 사람도 가족이다. 천국이 신앙인의 본향(本鄕)이라면, 가정과 가족은 이승의 고향이고, 조국이고, 종교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다(마가복음 14:36). 아람어 아바(אבא)와 헬라어 파테르(πατήρ)가 합쳐진 말인데, 아바는 ‘아빠’라는 뜻을 지닌 친근한 호칭이다. 여러 종교들의 의식에서 제사장이 신(神)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있었지만, 평범한 서민들에게 ‘하나님 아빠’라는 호칭을 가르친 것은 예수가 유일하다.
하나님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을 흰수염 난 백발의 할아버지로 나타낸 그림이나 조각들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 손녀가 없다. 신앙은 세습되거나 상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회심, 거듭난 삶,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주체적 결단이 신앙이다.
그렇지만 그 주체적 결단은 삶의 첫 자리요 이승의 마지막 자리인 가정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고, 열매 맺는다. 어버이와 아들딸이 삶을 함께 엮어가는 가정은 천국에로의 첫 여정(旅程)이다. 가정은 사랑의 감성(感性)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사랑의 책임으로만 가정은 든든히 뿌리내린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농익은 감성 때문이 아니다. 사랑의 감성을 ‘책임 있는 영혼’이 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삶의 책임을 벗어 던진 감각적 사랑으로는 가정을 지키지 못한다.
5월이 슬프지 않으려면, 감성의 사랑을 넘어 책임의 사랑이 무르익어야 한다. 5월이 계절의 여왕인 까닭은 신록이 푸르고 봄날이 따뜻해서가 아니다. 사랑의 책임이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 5월은 슬픈 계절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