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우근 칼럼] 신은 공평한가…베네수엘라의 고통 앞에서 묻는 인간의 책임과 자유

C. 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Till We Have Faces). 부제는 ‘다시 쓴 신화’(A Myth Retold)로, 그리스 신화의 큐피드와 프시케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 소설.

2026년 1월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마약, 테러 공모 등 혐의로 체포했다. 그때의 군사작전으로 민간인 포함 모두 100명의 베네수엘라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베네수엘라는 나라 전체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지난 6월 24일 베네수엘라에 연쇄 지진이 일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 후에도 1,222회에 달하는 여진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 가톨릭의 나라 베네수엘라의 국민이 저 끔찍한 재난 앞에서 신(神)을 부정하거나 신에게 절망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성서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9). 베네수엘라의 저 숱한 피해자들이 참새 한 마리보다 못할 리야 없지 않은가.

​오랜 세월, 불행과 재난을 수도 없이 겪어온 인류는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은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해오고 있다. 비록 신이 있다 하더라도, 사악한 신이거나 전지전능하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다.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는 굳이 신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고, 그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안성맞춤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줄 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렇지만 그런 ‘요행의 손재주’를 부려줄 신은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어떤 신자들은 장래 혹은 사후(死後)의 보장을 위해 헌금을 무슨 보험료처럼 꼬박꼬박 내기도 하지만, 신이 그런 보험업을 경영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요행이나 보장이 없어서 신을 부정하고 신에게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전능한 사랑의 하나님이 왜 끔찍한 불행을 허용하며 나 몰라라 임하는가 하는 의혹 때문에 신에 대한 부정과 절망이 솟아나는 것이다.

지난 6월 24일 베네수엘라에 연쇄 지진이 일어났다. 1,222회에 달하는 여진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

이런 부정과 절망은 비단 자연재해를 겪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민초(民草)들, 정의도 윤리도 외면한 채 오직 이기적 욕망만을 위해 치달리는 영악스러운 사람들의 현실적인 성공사례도 정의롭고 공평한 신을 의심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니, 사악한 사람들의 성공뿐이라면 그런대로 참을 수도 있겠다.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삶을 유린당하는 우리네 선량한 이웃들의 좌절감은 한낱 피조물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딱하기 이를 데 없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랴! 혼돈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땅에서, 세상 만사는 아무래도 공평해보이지 않는다.

마르크시즘이 선전하는 평등한 유토피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노력하고 애쓸 따름이다. 실질적 공평을 위해 고안된 ‘배분적(配分的) 평등’이라는 지혜도 불공평한 상황을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것일 뿐, 완전한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배분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신은 공평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C. S. 루이스는 판타지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Till we have faces)에서 현명한 노인의 입을 빌어 매우 현명치 못한 대답을 내놓는다. “오, 그렇지 않단다. 신이 공평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니?” 신이 기계적 산술적으로 공평하기만 하다면, 인간들은 모든 것이 꼭 같아 불평은 없을지 몰라도 삶의 역동성과 다양성, 인격의 자유와 개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성찰 아닐까.

“예수 이전의 유대교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신의 일방적 섭리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예수라는 메시아가 세상에 이미 왔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메시아 사건이 일으킨 새로운 공간에서 인간 스스로가 주도적 역할을 찾는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Slavoj Žižek)의 생각이다.

​주체적 결단을 망설이며 신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다(마태복음 16:24).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라’는 뜻이겠다. 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주체적 자유의 길을 열어가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귀에 어떤 말도 따뜻한 위로의 속삭임으로 들릴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들의 주체적인 삶의 의지와 소망, 그리고 불퇴전(不退轉)의 용기를 기대하면서 쑥스런 격려의 말 한 마디를 띄워 보낸다.

“고통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에서, 신의 손길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그대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라. 신은 그 고통과 불행 속에서 그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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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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