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로 번역되는 영어의 데모크라시(Democracy)는 그리스어 데모스(δῆμος)와 크라토스(Κράτος)에서 온 단어다. 고대 그리스의 지방 행정구역이었던 데모스는 그곳에 거주하는 민중 또는 시민 즉 귀족에 대비되는 평민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했다. 크라토스는 ‘권력·지배’라는 뜻이니, 데모크라시는 ‘평민의 지배’라는 말이 된다. 선동정치꾼을 가리키는 데마고고스(δημαγωγος)는 ‘데모스’라는 중심개념을 데모크라시와 같이 하면서도, 날카로운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민주정치인은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선동정치인은 국민의 감정을 들쑤신다.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대중’으로 보는 선동정치는 단순한 구호, 증오의 이분법으로 계층을 나누고 서로의 적대감정을 부추긴다. 안타까운 것은, 민주주의 안에서도 선동정치가 발을 붙일 수 있다는 현실이다.
민주주의와 선동정치는 가까운 거리에서 날카로운 긴장 관계를 이어간다. 대중선동의 정치꾼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의 두려운, 그러나 분명한 역설이다. 대중선동은 국민의 이성적 판단보다 공포와 불안, 분노와 증오, 편견과 확증편향 등의 감정을 들쑤셔 지지를 끌어내고,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을 정치꾼의 권력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대중의 불만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뒤집어씌워 희생양을 만들고, 반대파를 경쟁자가 아니라 배신자로 규정한다. 복잡다단한 국가적·사회적 현안들을 ‘민중과 함께 하는 우리’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라는 단순논리로 양분한다.
선동정치는 국민을 감성적으로 조작하는 연성(軟性)독재체제다.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연성독재, 문명의 외투를 걸친 야만을 대중은 민주주의라고 착각한다.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에르도안의 튀르키예, 북한의 김정은 등은 ‘법보다 힘’에 의존하는 독재의 살아있는 예이지만, 사회주의 나라들뿐이 아니다. 자유세계에서도 그런 현상이 빠르게 번져가는 현실을 우리는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다.
“선거는 무능한 다수가 부패한 소수를 뽑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의 독설이다. 꼭 옳지는 않겠지만, 꼭 틀린 말도 아닐 게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토대이지만, 민주주의의 본질이 선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주권, 국민의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삼권분립,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 자유로운 표현과 공적 토론의 보장, 폭력적 지배권력의 부정 등이 모두 확보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선동정치는 진실을 왜곡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며, 국민의 불안과 좌절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증오로 뒤바꾸고, 사법부·언론·전문가 등 비판세력을 적으로 몰아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나치독일의 선동가 괴벨스는 ‘언론은 정부의 피아노’라고 단언했다. 권력이 조작해낸 거짓이 사실과 뒤섞이면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생각과 판단을 선동가에게 내맡기는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스마트폰·인터넷·CCTV·데이터베이스 등의 현대 소셜미디어는 충격적인 영상이나 자극적인 짧은 문장으로 대중에게 크나큰 분노를 일으키면서 선동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민주주의의 적은 선동가 한 사람만이 아니다.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대중도 민주주의를 안에서 좀먹는 숙주(宿主)가 된다.

“민주주의는 총칼보다 투표함에서 더 자주 죽는다.” 미국 역사학자 헤더 콕스 리처드슨의 통찰이다. 18세기에 제러미 벤담은 소수의 감시자가 다수의 수용자를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할 수 있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감옥을 제안했다. 감시자는 중앙 감시탑에서 수용자들을 일방적으로 볼 수 있지만, 수용자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는 ‘시선의 비대칭’ 상태에서 항상 감시받는 상태를 느끼게 된다. 20세기의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을 현대 규율사회의 감시권력을 나타내는 전형적 통제모델로 재해석했다. 그 감시권력은 감옥뿐 아니라 군대·병원·학교·공장 등 현대사회 전체가 개인들의 일상을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국제정치학자 디디에 비고(Didier Bigo)는 판옵티콘보다 더 으스스한 밴옵티콘(Banopticon)을 주장한다. 사회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대상을 사회에서 아예 배제·격리·추방하는 전체주의 통제구조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중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통해 소수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는 사회, 서로를 ‘함께, 동시에 바라보는’ 사회 곧 범죄학자 토머스 마티센(Thomas Mathiesen)이 제안한 시놉티콘(Synopticon)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동정치에 매우 취약하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선동꾼에게 권력의 통로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권위주의적 선동정치는 단순한 독재가 아니다. 선거·사법부·언론 등 민주적 제도를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 권력을 사실상 자신에게 집중하고 국민의 자유를 축소하는 간특(奸慝)한 연성독재체제다. 자유 대신 평등을, 성장보다 분배를 외치는 대중선동의 포퓰리즘이 활개치면 행정권력을 견제하는 사법부의 독립과 언론의 중립성은 약화된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평등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자유를 포기하고, 부드러운 전제정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성과 합리성이 생명인 과학문명의 시대에 정치는 오히려 문명을 퇴보시키고 야만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문명과 야만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