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대를 움직인 정신은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를 배반하기도 한다. 자유와 해방을 외쳤던 이념이 새로운 권력이 되고, 변화를 꿈꿨던 세력이 기득권으로 굳어질 때 시대정신은 더 이상 미래를 여는 힘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이수봉의 <시대정신의 배신>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2023년 새론북스에서 나온 이 책에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무정부상태를 극복할 21C 시대정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제목이 과거에 대한 고발이라면 부제는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수봉은 책상에서 한국의 노동운동과 정치를 관찰한 사람이 아니다. 1982년 고려대 4·15 유인물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한 뒤 인천지역 공장에서 용접공과 프레스공, 주물공으로 일했다. 병원노련과 현총련, 금속연맹을 거쳐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을 지내며 30여 년을 노동운동 현장에서 보냈다. 이후 안철수와 함께 제3정치운동에 참여했고 국민의당과 바른미래당, 민생당을 거쳤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는 민생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런 저자가 자신의 청춘을 바친 운동과 정치를 향해 칼날을 겨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전향 선언이나 과거 동지들에 대한 공격으로만 읽기 어렵다. 저자는 책을 쓴 목적이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 있지 않으며, 자신을 향한 비판이기도 하다고 밝힌다. 자신과 동료들을 움직였던 시대정신이 어떻게 사상의 감옥으로 변했는지를 내부자의 경험을 통해 추적하려는 것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 ‘시대정신과 노동운동’에서는 1980년대 운동권 문화와 노동운동 내부의 정파 갈등, 민주노총의 변화, 기본소득과 계급정치 등을 다룬다. 2부 ‘정치교체’에서는 호남정치와 민주당, 국민의당·바른미래당·민생당으로 이어진 제3정치의 실험과 실패를 돌아본다. 3부 ‘새로운 시대정신’에서는 좌우 진영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를 모색한다.
저자의 비판은 좌파에 집중되지만 우파와 제3정치세력도 비켜 가지 않는다. 그는 한국 좌파가 성찰하지 않는 신기득권으로 변했고, 우파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정치인을 키우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좌우 양극단을 극복하겠다던 제3정치 역시 뚜렷한 노선과 시대정신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현실 정치에서 좌절했다고 평가한다.
책의 핵심은 ‘누가 옳은가’보다 ‘우리가 무엇에 갇혀 있는가’를 묻는 데 있다. 저자가 말하는 배신은 시대정신 자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을 속였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과 조직이 변화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권력과 정당성을 지키는 수단으로 굳어졌다는 비판에 가깝다.
대안으로 저자는 ‘신자유민주주의’, ‘초지성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5.0’, 기득권 카르텔 청산과 지역분열주의 극복을 제시한다. 이 개념들이 충분히 정교한 정책 체계로 완성됐는지는 독자가 따져볼 대목이다. 다만 노동운동과 제3정치의 한복판을 통과한 사람이 자신의 진영과 지난 선택을 공개적으로 되돌아본다는 점은 이 책의 분명한 가치다.
<시대정신의 배신>은 중립적인 정치 해설서가 아니다. 저자의 경험과 판단, 분노가 강하게 배어 있는 논쟁적인 책이다. 일부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고, 반론이 필요한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진영의 언어가 대화를 대신하고 정치적 입장이 인간관계까지 갈라놓는 시대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의심하고 자신의 신념을 해부하려는 태도는 가볍게 볼 수 없다.
오늘 한국 정치에 부족한 것은 또 하나의 구호가 아닐지 모른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오류를 먼저 들여다보는 용기, 과거의 정답이 오늘도 정답인지 묻는 성찰, 그리고 좌우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나아갈 방향을 찾는 노력이다.
시대정신은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이수봉의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생명력을 잃은 시대정신에 붙잡혀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