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황건의 나고야 산책] 미인에서 발레슈즈까지…262년을 건너온 시선

안셀름 키퍼의 ‘시베리아의 왕녀’.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과 거친 화면 한쪽에 작은 발레슈즈가 걸려 있다. 필자 황건 팀닥터는 처음에는 철길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작품 설명을 읽고 다시 바라본 뒤 ‘M. Wolkonskaja’라는 이름이 적힌 발레슈즈에서 오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제 한국 여자 핸드볼대표팀이 홍콩을 크게 이겼다. 한국 대표팀 팀닥터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나고야에 와 있는 나는 경기가 끝난 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잠시 자유시간이 생겼다. 나고야시립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미술관은 시라카와공원 안에 있었다. 공원에는 분수가 있었고 해시계도 있었다. 건너편에는 나고야시과학관이 둥근 돔을 이고 서 있었다. 선수들의 경기와 함성이 끝난 뒤 찾아온 오후의 한가로움 속에서 나는 잠시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관 상설전시실에 들어섰다. 여러 작품 가운데 처음 내 눈을 붙잡은 것은 안셀름 키퍼의 ‘시베리아의 왕녀’였다. 처음에는 철길만 보였다. 거대한 화면 한가운데로 철길이 뻗어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철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림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품 설명을 읽었다. 제목은 ‘시베리아의 왕녀’. 독일의 현대미술가 안셀름 키퍼가 1988년 만든 작품이었다. 화면에는 철길뿐 아니라 납판과 흙, 찢어지고 불탄 듯한 흔적들이 있었다. 설명을 읽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발레슈즈 한 켤레가 작품 한쪽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레슈즈에는 ‘M. Wolkonskaj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리아 볼콘스카야. 남편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연루돼 시베리아로 유배되자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간 러시아 귀족 여성이었다.

철길을 따라가던 내 시선이 갑자기 한 사람에게 닿았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왜 이 작은 신발에 이렇게 마음이 끌렸을까.

아마도 처음 보았을 때는 철길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철길과 잿빛 하늘, 찢어진 화면이 먼저 눈을 압도했다. 그런데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그 거대한 역사 한가운데 아주 작은 한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발레슈즈 한 켤레.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도 없다. 몸도 없다. 이름 하나가 적힌 작은 신발만 남아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한 여자의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문득 이곳 나고야에서 오래전의 조선통신사를 생각했다. 1764년 조선통신사 일원이었던 김인겸은 나고야에서 일본 여성들을 보았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기록했다. 눈과 입술, 피부와 눈썹, 이마와 손까지 살펴보았다. 낯선 나라의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이 본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많은 세월이 흘러 같은 나고야에 한국 사람 한 명이 왔다. 그는 조선통신사도 아니고 외교관도 아니다.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한국 여자 핸드볼대표팀의 팀닥터다. 그리고 나고야에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작은 발레슈즈 한 켤레였다.

1764년의 조선통신사는 나고야에서 미인을 보았고, 2026년의 한국 팀닥터는 나고야에서 발레슈즈를 보았다. 그 사이에는 262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시라카와공원의 해시계가 문득 떠올랐다.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도 사라진다. 하지만 때로는 아주 작은 물건 하나가 그 사람을 다시 불러낸다. 마리아 볼콘스카야를 내 앞에 불러낸 것은 그녀의 이름이 적힌 발레슈즈였다.

나는 미술관을 나와 다시 시라카와공원을 걸었다. 분수에서는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해시계는 말없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맞은편 과학관의 둥근 돔도 오후의 빛을 받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는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몸을 보았다. 그리고 경기장을 떠나서는 한 여자의 이름이 적힌 작은 신발을 보았다. 아시안게임을 보러 나고야에 왔다가 나는 뜻밖의 시간여행을 했다.

조선통신사가 보았던 나고야와 내가 보는 나고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에 시선을 멈추고 그것을 기억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닮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철길에 빨려 들어갔다.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발레슈즈가 보였다. 나는 결국 그 작은 발레슈즈에 홀리고 말았다.

미인에서 발레슈즈까지. 나고야에서 내가 본 것이다.

1764년 조선 외교관이 본 나고야 여성들…“모두가 절세미인” – 아시아엔 THE A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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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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