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의 고백은 두려운 일이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제 본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고백을 글로 남기는 참회록을 쓰는 일이다. 참회의 마음을 스스로 다잡는 것도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을 글로 나타낸다는 것은 제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세상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처럼 괴로운 결단일 터이다. 애매하게 쓰면 위선으로, 진솔하게 쓰면 위악(僞惡)으로 비난받기 일쑤다. 아니면, 제 본 모습을 감추는 변명 또는 거짓이 되거나…
일제 치하에서 비통한 삶을 살았던 시인 윤동주는 스물다섯 살에 쓴 시 ‘참회록’에서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욕된’ 삶을 탄식하며 스스로를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으로 그렸다.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에게서는 독배를 들이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예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화형대에 묶인 조르다노 브루노의 모습이… ’우주는 무한히 퍼져 있고, 태양은 그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수많은 항성들은 각각의 지구를 거느리고 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16세기 유럽, 천동설의 우주관을 고집하는 가톨릭 교리를 참회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슴에 품고 막강한 종교권력에 저항한 가톨릭 수도사 브루노는 화형대의 뜨거운 불길에 한 줌 잿가루로 남고 말았다.
거짓이 진실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참회란 정녕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욕되고,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고통의 길 아닐까? 그 힘겨운 고난의 언덕을 내가 오를 수 있을까?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 있는 개가 제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뒤에서 무턱대고 따라 짖는 개…’ 주자학이 신성불가침의 시대정신으로 군림하던 명나라 말기, 그 유일체제에 도전하여 감히 주희(朱熹)를 ‘성현(聖賢)의 도(道)로 백성의 마음을 짓이긴 자’라고 비웃으며 겁도 없이 공맹주(孔孟朱)를 깎아내린 탁오 이지(卓吾 李贄)가 토해낸 참회의 고백이다.
주자학의 위선과 유학자들의 사상적 허구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눈 탁오는 붉은 먹물 듬뿍 찍은 적필(赤筆)로 <분서(焚書)>를 써 내려갔다. 주류 학계로부터 ‘요물’이라는 악평까지 듣다가 결국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탁오는 철창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고 믿은 탁오는 그 교조적(敎條的) 가르침에 저항한 사상의 레지스탕스였다.
‘불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인 <분서>는 그 저항적 성격 때문에 오랜 세월 금서(禁書)로 묶여 있었다. 자연스러운 인간본성을 감추거나 억압하는 도그마를 한낱 위선의 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 탁오는 공맹주 자체를 비판했다기보다 그들을 절대화, 신성시한 유학의 교조주의를 비판한 것이리라.
탁오의 ‘한 마리 개’는 단순한 자책(自責)의 비유가 아니다. 생각 없는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품은 참회, 기나긴 나날들을 거쳐 오며 마음속 깊숙이 쌓인 회한이 터져 나온 통찰이었을 것이다. 실체가 아닌 허상을 좇으면서 시대의 유행이나 외부의 사상적‧종교적‧정치적 권위 또는 다수인의 함성을 따라가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여는 주체적 인격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지금껏 제 삶을 지탱해온 기둥들을 몽땅 뽑아버리는 처절한 아픔이 배어있다.
참회록을 쓴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가? 윤동주보다 더 아파야 하고, 브루노보다 탁오보다 더 처절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를 감추지 않은 진실한 고백이 저들을 자유롭게 했다. 고백은 수치가 아니다.
참회의 자리, 회복의 길이다. 참회하는 순간, 진실을 만난다. 비록 처절할지언정, 비록 비통할지언정…부끄러웠던 지난날의 몸의 행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과 분노, 이따위 잡동사니들을 쓸어내지 않은 채 마지막 숨 편히 내쉴 수 있을까?
‘자아(自我)는 자기의 집이 아니다’라는 프로이트의 우울한 진단처럼 남의 집에서, 환각의 식민지에서 맘 편히 살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을 보고 짖는지, 왜 짖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다른 개들의 짖는 소리에 덩달아 짖어대는 개… 남이 박수칠 때 따라서 박수치고, 남들이 분노할 때 좇아서 분노하고, 다른 사람이 소리칠 때 함께 소리 질러대지 않았던가? 내 생각, 내 판단이 아니라 다수인의 생각, 외부적 권위의 판단에 수동적으로 이끌린 삶이 아니었던가?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는데, 탁오는 바로 그 나이에 지천명의 경지에 이르렀던가 보다. 지천명의 나이를 훨씬 지나온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지천명은 운명에 그저 굴종하는 숙명론이 아니다. 자기 삶의 목적, 방향, 책임을 자각하고 실존의 존엄을 깨우치는 통찰일 것이다. 옛 시절만의 깨우침이 아니다. 유행의 물결이 넘쳐나고, 온갖 정보가 무수히 쏟아지고, 대중의 함성이 거리와 광장을 뒤덮고, 정치권력이 대중의 생각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깨우침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독립국가의 자유시민으로 살아온 나는 어느덧 지천명의 고개를 멀리 넘어섰건만, 식민 치하의 젊디젊은 윤동주를 비통하게 했던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욕된’ 삶의 아픔도,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도 품지 못한 채 하냥 세월을 보내고 있다.
‘말 없는 사람을 조심하고, 짖지 않는 개를 경계하라.’ 북미 인디언 샤이엔족의 가르침이다. 시끄러운 군중, 말 많은 정치, 사유(思惟) 없는 신념이 사람들을 개처럼 덩달아 짖게 만든다. 마음속 깊은 생각과 성찰은 만날 길이 없다. 침묵해야 한다. 성찰해야 한다. 개 짖음을 멈춰야 한다. 덩달아 짖지 않는 개가 되어야 한다.
자기 앞에 정직한 참회의 울림을 시뻘건 피처럼, 적필의 붉은 먹물처럼 뿜어내야 한다. 그 울림이야말로 살아 있는 숨결, 영혼이 지닌 마지막 진실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