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칼럼

[이우근 칼럼] 두 개의 나무토막에서 멀어진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

성탄절인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Missa)’라는 뜻이다. 미사가 ‘보냄, 파견’이라는 라틴어 missio에서 파생된 단어이니,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구세주)를 세상에 보낸다’는 의미가 될 터이다. 가공할 무기 미사일(missile)이 missio에서 나온 단어라는 것은 섬뜩한 아이러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가 사라져간다. 베들레헴의 초라한 시골 마구간이 울긋불긋한 쇼윈도의 예쁜 장식들로 치장되고, 성탄의 소식을 맨 처음 만난 광야의 목자들은 근엄한 예복을 걸친 성직자들로 대체되었다. 먼 이방에서 동방박사들을 이끌어온 성탄의 별도 웅장한 종교의 전당 십자탑 위에서 ‘해피 홀리데이’의 상징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영성(靈性)이 어둠에 파묻히면, 욕망에 부푼 기복(祈福)의 제도종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거칠고 음울한 십자가는 보기 좋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종교의 상징물로 대체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성탄은 시끄럽고 흥청거리는 짝퉁 성탄절로 뒤바뀌었다. 그렇지만 성탄절의 세속화(世俗化)를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성탄은 종교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구유는 역설의 자리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진리가 태어난다.“ 영국 작가 체스터튼(G. K. Chesterton)의 깨달음이다. 크리스마스는 교회와 신자들만의 축제일이 아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다가오는 빛의 소식이다. 오늘의 캄캄한 세상에도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빛을 밝히고 있다(요한복음 1:5).

​크리스마스는 모든 것을 뒤집는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임 받는다. 성전의 지성소가 아니라 목자와 양들의 황량한 들판에, 궁궐의 왕좌가 아니라 시골여관의 마구간에,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아니라 이방인 동방박사들에게 성탄의 기적이 찾아온다.

크리스마스의 참뜻은 울긋불긋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이 아니라 크리스천의 착한 행실(마태복음 5:16)에, 교리나 의식(儀式)이 아니라 인격적 감화(感化)의 삶에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와 교감(交感)하는 공공신학(公共神學, public theology)의 지향점일 것이다.

구유와 십자가

​예수의 삶은 두 개의 나무토막 사이에 있었다. 태어날 때의 구유와 죽을 때의 십자가… 갓난아기 예수를 받은 것은 나무 구유였다. 목수 일로 나무를 다루던 그는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성탄의 구유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구유를 돌아본다. 탄생의 아침과 죽음의 저녁이 세밑 성탄절의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하나로 만난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의 찬란한 불빛은 시골 마구간의 구유와 어울리지 않고,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도 핏빛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다.

성탄은 우리의 어두운 실존, 그 거짓된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며 우리 삶의 자리를 깊숙이 뚫고 들어오는 방어할 수 없는 빛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참된 신학은 정의에 대해 실천적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신념이다.

‘삶의 현재성’에 눈길을 맞추는 실천신학은 고백에 따르는 인격의 변화, 고백과 하나된 올곧은 삶 속에 신앙의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은 삶의 도덕성일 수밖에 없다.” 신학자 니이버(R. Niebuhr)의 지적이다.

교회당 안에서 신자들끼리 합창하는 ‘오, 홀리 나이트(Oh, Holy Night)’만으로는 성탄의 거룩한 뜻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지 못한다. 들뜬 기분으로 ‘징글벨’을 울려대는 ‘메리 크리스마스’의 흥청거림도 성탄의 바른 메시지라고 하기 어렵다.

예수의 성탄이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사회를 위한 고난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성속(聖俗)의 바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고뇌의 밤을 뒤척이고 참회의 새벽을 열어도 아쉬운 어두움의 시대, 어느 때보다도 진실과 평화의 메시지가 그리운, 전쟁과 독재와 상쟁(相爭)의 살벌한 시절이다. 제도종교의 웅장한 전당에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이벤트에서는 그 진실과 평화의 메시지를 만나기 어렵다. 차라리 마구간의 구유처럼 초라한 시골 예배당의 소박한 자리에 성탄 메시지가 오롯이 담겨있지 않을까.

성탄의 빛은 낮은 속삭임으로 잊혀진 자리를, 소외된 틈새를 고요히 파고든다. 섬김, 나눔, 보살핌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잔잔히 밝히는 성탄절이 아니라면, 눈부시게 치장한 크리스마스 트리들은 두 개의 나무토막, 구유와 십자가의 자리를 멀리 벗어나 들뜨고 흥청거리는 불빛으로 거리와 광장을 분주하게 떠돌 뿐이다. 비록 12월 25일이 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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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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