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이우근 칼럼] 대한민국, 손에 손잡고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

손에 손잡고

톨스토이는 이렇게 탄식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무신론자 이반의 입을 빌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는 신이 없으면 보편적 진리도 없고 선악의 기준도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일 뿐이다.

정신분석의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더불어 <에크리(Écrits)>를 쓴 정신과 의사 자크 라캉은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금지하는 도덕적 질서, 곧 ‘상징계의 대타자(大他者)’가 없다면 인간의 욕망은 방향을 잃고 무질서해진다는 의미였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말을 다시 뒤집었다. 스스로 마르크시스트라고 밝힌 그는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내뱉었다. 이는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자기 행동을 신의 뜻이라고 포장하며 정당화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를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사악한 반인륜적 범죄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상당수는 종교의 깃발 아래 자행되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의 학살,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백인들의 아메리카 정복과 인디언 살육,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까지 모두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이뤄졌다. 결국 인간은 ‘신이 있으나 없으나’ 제 마음대로 행동해온 셈이다.

“담대하게 죄를 지어라.(Pecca fortiter)” 이 섬뜩한 말을 남긴 이는 놀랍게도 마르틴 루터였다. 그러나 그 의미는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랐다. 루터는 종교개혁 동지 멜랑히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더욱 담대하게 믿어라. 죄와 죽음과 세상을 이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sed fortius fide et gaude in Christo, qui victor est peccati, mortis et mundi)”

루터는 인간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본질상 불완전한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죄를 피하려고 불안 속에 살기보다 오히려 죄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더 확고히 그리스도의 용서와 은혜를 붙잡아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그의 말은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되,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담대히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죄를 두려워하되, 죄에서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굳게 붙들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Dilige, et quod vis fac.)는 놀라운 선언을 남겼다. 이는 타락이나 방종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는 어떤 권위나 규범으로도 꺾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주장이 일정 부분 옳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제가 있다. ‘사랑 안에서’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사랑의 수고 없이 단지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 욕망이다. 기도를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올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만나는 자리가 곧 사랑의 자리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요한1서 4:8)은 우리를 자유로운 사랑의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의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신다(마태복음 5:45).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사랑으로 하나 됨을 이루고, 그 사랑 안에서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아름다운 영혼(schönen Seele)’을 논하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지은 죄를 고백하는 양심’과 ‘남의 죄를 용서하는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통로라고 했다.

하나님의 정의는 불의와 죄악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증오의 불길이나 정의의 화염이 아니다. 목마른 이에게 생명수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강물, 평화의 바다, 곧 사랑의 물길이다(아모스 5:24).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에 업적을 남긴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라는 책에서 요한복음의 ‘하나님=말씀’을 ‘하나님=사랑’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단죄하는 단선적 정의에 멈추지 않는다. 불의한 삶이 의로운 자리로 돌이키도록, 죄인이 의인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낸다. 사랑은 돌이킴과 거듭남으로 나아간다.

오늘날 갈가리 찢긴 이 나라와 흩어진 사회가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평화의 공동체로 서기를 바란다. 헐벗고 굶주려 외로운 이들을 위한 나눔과 보살핌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공동체로 변모하기를, 따뜻한 숨결이 함께 내쉬어 모둠살이의 향기가 가득 퍼지기를 소망한다.

그릇되고 일그러진 죄성(罪性)을 돌이켜 거듭나게 하는 구원의 바다에서, 사랑의 노를 더욱 담대히 저어갈 수 있기를…

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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