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람세계칼럼

[이우근 칼럼] 종교개혁 두 지도자 루터와 츠빙글리

츠빙글리 초상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태풍을 일으켰고, 울리히 츠빙글리는 1523년 1월 29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67개조 논제>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루터가 ‘오직 믿음’(sola fide)을 외칠 때 츠빙글리는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부르짖으며, 신학의 영역을 넘어 삶의 영역 전체를 성서의 빛 아래 새로이 조명하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이자 유럽 인문주의를 이끌었던 에라스무스의 성서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성서에 아무 근거가 없는 가톨릭의 현란한 종교의식,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이 아니라 교회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바랐지만, 그의 희망과 달리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번져나가 활활 타올랐다.

​“오직 성서만이 신앙과 교리의 근거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뿐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며, 거짓 사도요 사탄의 화신이다. 면죄부 판매는 사탄이 고안해낸 사악한 제도다. 고해성사는 죄를 용서받는 수단이 아니리 단지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면세혜택과 재산 축적을 없애고, 경제적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츠빙글리는 <67개조 논제>에 짙은 공공성(公共性)과 사회성(社會性)을 핵심 내용으로 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교황의 명령보다 밝다.” 츠빙글리의 외침이다.

그는 성서를 직접 읽고 해석하는 자유를 신자들 자신에게 돌려주었고, 면죄부‧고해성사‧성상(聖像)숭배 등 가톨릭의 전통과 관행들이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적 장벽이라고 비판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당시의 유럽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으며, 교황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츠빙글리의 <67개조 논제>는 취리히 시의회의 공개 토론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아 취리히를 스위스 최초의 개신교 도시로 변화시켰다. 예배를 화려한 의식이 아니라 말씀과 설교 중심으로 바꿨고, 미사의 제단과 장식적 도구들을 없앴으며, 성서를 라틴어가 아니라 스위스 공용어인 독일어로 읽었다.

결혼제도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이 제정한 가정의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 츠빙글리는 독신제를 반대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했다. 아울러 빈민구제, 복지의 확대, 교육제도의 개혁 등으로 취리히 전체를 그리스도의 윤리로 다시 세우는 사회개혁과 정의 실현에 몰두했다.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와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두 지도자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聖餐)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면서 대립했다. 그들은 1529년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만나 화해를 시도했지만,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성찬의 포도주와 빵이 신부가 축도(祝禱)하는 순간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에는 모두 반대했지만,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1장 24, 25절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서로 달랐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받은 신자의 몸속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는 공재설(共在說)을 내세웠다. ‘이는 내 몸이요, 내 피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記念, 헬라어 ἀνάμνησιν 아남네신, 영어 remembrance)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의 살과 피를 상징‧기억‧기념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린도전서에는 ‘ἀνάμνησιν’으로 기록되어 있다. 루터가 츠빙글리에게 “그대는 다른 영(靈)을 가졌다”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따로 걸었다. 츠빙글리의 신념은 그 후 장 칼뱅, 하인리히 불링거 등에게 상당 부분 계승되어 개혁교회 전통 속에서 상징과 현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신학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츠빙글리는 ‘개인 구원’에 머물렀던 중세 가톨릭의 닫힌 신앙을 벗어나 ‘사회 개혁’이라는 열린 신앙의 길로 나아갔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신학의 영역을 넘어 공공(公共)의 삶을 성서의 토대 위에 세우는 문명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군사적 대결로까지 치달을 때 츠빙글리는 중립이 아닌 개혁의 연합을 촉구하며 스스로 전쟁터에 나갔다. 오른손엔 성서, 왼손엔 칼… 스위스 취리히에 세워진 츠빙글리 동상의 모습이다. 오른손의 성서는 그의 신념인 ‘오직 성서’를, 왼손의 칼은 그의 신학이 품은 사회성‧공공성을 상징한다.

츠빙글리는 1531년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그가 흘린 피는 개혁신앙의 토양 속에 흠뻑 배어들어 종교의 사회적 책임, 경제의 양극화 해소, 인권보장과 약자 보호 등 현대적 공공신학(公共神學) 이해에 탄탄한 주춧돌이 되었다.​

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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