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시베리아 강제 억류 피해자 유족 문용식씨의 피눈물 나는 20년 추적
“1965년 협정은 강점기 채권·채무 문제…소련 억류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발생”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이 모든 사람에게 곧바로 자유와 귀환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으로 동원됐던 조선인 가운데 일부는 일본 패전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고, 소련 영내 수용소로 이송돼 장기간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
고(故) 문순남씨의 아들 문용식씨가 20년 넘게 추적해온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이제 새로운 법적·역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인가.” 문용식씨의 답은 분명하다. “한일협정과 관계가 없습니다.”
문씨는 27일 <아시아엔>과 전화 인터뷰에서 “시베리아 억류는 해방 이후 벌어진 일”이라며 “한일청구권 협정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있었던 양국 간 채권·채무 문제를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발생 시점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은 일본 식민지배 기간 동안 발생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를 다룬 협정이다. 반면 시베리아 억류는 일본이 1945년 8월 항복한 이후, 일본군이 무장해제되고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처리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문씨는 “소련에 억류된 사람들은 8월 15일 이후 무장해제되고 체포돼 수용소로 이송됐다”며 “소련이라는 국가가 관여한 절차 속에서 진행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강점기 피해와 해방 이후 국가 조치는 구분해야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둘러싼 문씨의 문제 제기는 단순한 보상 요구가 아니다. 그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강제동원 문제와 함께 다뤄져 온 시베리아 억류가 실제 발생 과정에서는 별도의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동원이라는 배경은 존재하지만, 실제 억류와 노동 동원은 일본 패전 이후 소련의 조치였다는 것이다.
문씨는 “한일청구권 협정의 큰 줄기는 양 체약국 간 채권·채무를 정리하는 것”이라며 “해방 이후 제3국에 의해 발생한 피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디 있었는지 찾는 데 20년 걸렸다
이 문제를 붙잡게 된 출발점은 거대한 국제법 논쟁이 아니었다. 한 가족의 질문이었다.
문순남씨는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소련군에 체포돼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3년 넘게 억류 생활을 한 뒤 1949년 귀환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문용식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 이후 자료 확인의 길이 열렸고, 러시아와 한국의 기록을 추적하며 아버지의 억류 기록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이 겪은 역사의 한 장면과 마주하게 됐다.
해방 이후 피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시베리아 억류 문제의 핵심은 결국 책임의 문제로 돌아온다. 일제강점기 동원이라는 출발점, 일본 패전 이후 소련의 억류 조치, 그리고 냉전 속에서 침묵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삶이 겹쳐 있다.
문용식씨는 묻는다. “해방 이후 발생한 피해를 어떤 틀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80년이 지난 지금도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정리된 문제인지, 아니면 해방 이후 별도로 발생한 국제적 피해인지. 그 질문에 대한 사회적·법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문용식씨가 오랜 시간 기록을 찾아온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