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사망이 멸망당한 세계, 오늘에서 시작되는 영원

이승과 저승을 철저히 분리하고 이승을 단지 저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신앙은 죽음의 권세에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이 그어놓은 한계에 굴복하는 것입니다.-본문에서 <AI 생성 이미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이사야 25:8상)

사람은 죽습니다.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의인도 악인도,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사람을 살린 의사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도 결국 같은 자리에 눕습니다. 죽음은 가차 없이 모든 것을 평준화시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허무하다고 탄식했습니다(전도서 2:11-17).

죽음이 뿜어내는 허무의 기운은 우리 인생을 늘 감싸고 돕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굳이 의미 있게 살 필요가 있을까? 이 모든 수고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 앞에서 인간은 허무를 느낍니다.

이 허무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종교는 흔히 ‘저 세상’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힘들었으니 저 세상에서 보상받을 것이다”라는 위로가 일시적인 진통제는 될 수 있어도 삶을 짓누르는 허무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고안된 천국은 또 다른 이름의 허무주의일 뿐입니다. 이승과 저승을 철저히 분리하고 이승을 단지 저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신앙은 죽음의 권세에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이 그어놓은 한계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망 자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사망이란 이승과 저승, 현재와 영원을 갈라놓는 존재론적 경계선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경계선을 지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망에 무의미함을 선고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의미를 선물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망이 멸망당하면 ‘저승’도 사라집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두 세계는 연속된 하나의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의 구분이 사라질 때 비로소 ‘오늘’이 ‘영원’을 향해 활짝 열리고, 허물어진 경계를 넘어 영원이 우리 삶에 침공해 들어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은 죽음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영원이 시작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한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성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예수님의 첫 선포는 천국이 방향의 문제라는 사실을 명시합니다. 나 자신을 향해 안으로만 굽어 있던 존재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하나님께 돌이킬 때 그 방향에 영원한 천국이 존재합니다.

복음은 사망에 대한 사망 선고입니다. 천국은 현생과 내세 사이에 세워진 사망이라는 장벽을 허물고 지금과 영원을 통합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실 도피처 천국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망을 멸하고 이 땅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온 천국을 오늘 여기서 숨 쉬며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망이 멸망당한 세계에 허무가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N0nj74rUsvw?si=yLortg8GuOLiL-w5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