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석문섭 칼럼] ‘최측근’이라는 권력의 배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물 위를 걷는 예수〉(1888). 어두운 바다 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민다. 배 밖으로 나서는 믿음과 자신을 붙드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떠올리게 한다.

*잠깐묵상 | 마태복음 14장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9)

오병이어 사건 직후 대중은 흥분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준 능력자를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제자들도 덩달아 흥분했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었던 자기들의 인생에 드디어 해가 뜨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을 일부러 흩으시고 제자들을 서둘러 배에 태워 바다로 내모십니다. 성경은 ‘재촉하사’라고 기록합니다. 등 떠밀려 바다로 나간 제자들은 곧 풍랑을 만났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준비했다가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 바다 위,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배 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라.” 내가 갈 테니 기다리라가 아니었습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 한마디에 베드로는 일렁이는 바닷물에 발을 딛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 훈련이란 배를 버리는 연습의 반복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배 밖으로 나오는 연습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반복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를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굳게 믿고 자부하는 그 순간조차도 내면의 조선소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배를 건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의 낡고 비린내 나는 어선은 미련없이 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대중의 환호를 받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앞에서 보며 그들은 보이지 않는 더 크고 화려한 배를 짓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최측근’이라는 권력의 배였습니다. 물리적인 배는 버렸지만, 탐욕과 교만으로 빚어낸 ‘제2의 배’에 올라타려던 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억지로 칠흑 같은 바다로 밀어 넣고, 풍랑 한가운데서 굳이 “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에서 다시 내리라는 것입니다.

배 밖의 바다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단 1%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성, 나의 경험, 나의 근육은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힘을 잃습니다. 오직 나를 부르신 분에 대한 신뢰만이 나를 물 위에 띄우는 유일한 부력이 됩니다. 조건과 환경에 기대던 삶에서 존재와 관계에 기대는 삶으로의 철저한 이동. 이것이 배를 버리는 훈련의 핵심입니다.

비록 몇 발자국 못 가 바다에 빠질지라도 나를 낚아채는 주님의 손을 생생하게 경험해 보는 것. 신앙은 이 경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가라앉더라도 나를 붙드시는 분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배 밖으로 투신하는 것입니다.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
AI 에이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