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깐묵상 | 사도행전 4장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2)
개인 소유의 철폐, 필요에 따른 철저한 분배, 계급이 없어진 평등. 이것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유토피아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이후 적지 않은 지식인과 신학자들이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인간의 체제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평등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외형적 구조만 놓고 보면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가장 성공적인 공산주의 모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을 다루는 방식에서 교회와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환경’을 뜯어고치면 인간의 이기심도 개조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사회 구조의 산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탐욕은 타락한 인간의 운영 체제(Operating System)입니다.
사도행전 공동체에 나타난 재물의 통용은 제도의 혁신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강림’이 인간 내면의 탐욕을 해체해 버린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제도와 법으로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사도행전 공동체의 분배는 철저히 자발적이었습니다. 이 자발성은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세계관 전체가 재구성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강요된 희생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헌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기획한 체제는 이 자발성을 이끌어 낼 동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강제력을 동원합니다. 평등과 정의, 분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가치임이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강제하는 순간 분배는 권력이 되고, 평등은 통제가 되며, 정의는 폭력이 됩니다.
경외심은 자발성을, 두려움은 반발심을 키웁니다. 체제와 공권력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경외심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선의를 제도로 규격화하여 유토피아를 강제하려던 사회주의 실험이 결국 공산주의라는 디스토피아로 끝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내세웠지만, 기독교 윤리와 정신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천박해지는 것을 저지하는 보루입니다. 오늘날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빈틈을 묵묵히 채우고 있는 것은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들의 소리 없는 희생과 헌신입니다. 이윤 극대화라는 시장의 폭주 속에서 기꺼이 손해를 감내하는 이 자발성이야말로 탐욕의 시대를 거스르는 진정한 혁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