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석문섭 칼럼] 주머니 속의 신 ‘드라빔’

손안에 쥔 작은 우상 드라빔. 메마른 들판 너머로 비를 머금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AI 생성 이미지)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스가랴 10:1)

바벨론에서 돌아온 그들은 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비를 구하지 않았을까요? 비 한 방울 내리지 못하는 드라빔을 손에 쥔 채 말입니다.

포로기 이후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아적 영광이나 다윗 왕조의 부활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대국들의 고래 싸움 속에서 새우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습니다. 언약의 성취가 지연되자 신앙은 점점 메말라 갔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헬라 제국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세상을 집어삼키려 다가오는데,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메시아의 나라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장 농사는 지어야겠는데 비가 오지 않으니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은 어느새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고, 오늘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당장의 불안을 달래 줄 실용적인 신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게 바로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의 본질은 그 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광대한 신보다 휴대가 간편한 신을 좋아합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신, 내 손아귀에 쥘 수 있는 신, 내 호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신. 즉 드라빔은 단순한 심리적 애착 인형이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을 내 소유물 중 하나로 가지겠다는 의지이자 신마저도 내 뜻대로 부리겠다는 통제 욕구의 발현입니다.

우리는 나를 압도하는 위대한 신에게 거부감을 느낍니다. 내 계산을 벗어나고, 내 욕망을 거스르며, 내 삶에 간섭하고, 내 자아의 해체를 요구하는 신은 부담스럽고 불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핍을 채우고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신을 실용적 도구로 축소하려 듭니다. 내가 원할 때 꺼내 보고 필요 없을 땐 다시 집어넣을 수 있는 만만한 애완용 신앙을 발명해 내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근원, 삶의 본질, 자아의 밑바닥을 직면하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당장의 고난을 잊게 해 줄 진통제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그 드라빔은 어디서 만들어질까요? 세상이 아닙니다. 교회야말로 드라빔을 생산하기에 최적화된 공장입니다. 찬양, 설교, 기도, 훈련 프로그램 등에 나의 온갖 세속적 욕망을 투사해 놓고는 ‘여호와’라는 상표를 붙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인증 마크가 찍힌 드라빔으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며 느끼는 안도감이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일까요? 우리는 과연 드라빔이 하나도 없는 텅 빈 주머니를 견딜 수 있을까요?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
AI 에이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