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이왕 세상 무대에 던져졌다면…
산책을 하다가 수평선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벤치에 앉았다. 나는 매일 시간과 보는 높이를 달리해 바다를 감상한다. 해변가 데크에서 걸을 때 보이는 바다는 미술관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아름답다.
철썩이며 다가오는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모래사장을 걷다가 몸을 돌려 마주보는 바다는 또 다르다. 충만한 바다가 내 가슴속으로 넘쳐 흘러들어와 하얀 거품을 튕기며 치솟아 오르는 것 같다. 나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바다를 보는 것도 즐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바다의 속살이 보이는 것 같다. 바닷가에 와서 살아보니 바다는 아침이 다르고 점심이 다르고 저녁이 달랐다. 수평선에 유리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한낮의 바다는 졸고 있는 것 같다. 파스텔 같이 부드러운 색조의 저녁 바다는 내게 은근히 뭔가 알려주려고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다는 수시로 난해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파도가 소리치며 우르르 우르르 몰려올 때가 있다. 무엇이 그렇게 바다를 아우성치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다가 미동도 하지 않고 거울같이 조용하면서 그 안에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담고 있을 때도 있다. 루브르미술관에 가면 인간이 만든 한 점의 그림 앞에 앉아 몇시간씩 감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노년에 하나님의 작품인 바다를 만끽하고 있다.
어제 바다 위로 하얀 빛이 쏟아져 내리는 오전 열 한시의 태양 아래서 화물선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수평선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앉은 벤치 옆에 늙은 남자가 앉아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가 은빛이었다. 여행객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바닷가 마을에 사십니까?” 내가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 육십팔 년을 이 바닷가에서 살아왔습니다. 바다에서 놀면서 어려서부터 수영을 했죠. 그러다 보니 수영선수가 되고 한여름이면 안전요원으로 일거리를 얻어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기도 하고 물속에 들어가 배들의 스쿠류에 걸린 해초들을 뜯어내기도 했어요. 바다 옆에 살다가 보니 수영선생이 되어 평생 사람들에게 헤엄치는 걸 가르쳤어요. 저는 고향인 바다를 떠나 본 적이 없어요. 서울 사람들을 보면 이상해요. 아파트도 비싸고 공기도 나쁜 그런 곳에서 왜 그렇게 오골오골 모여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지 몰라요. 여기 동해로 오면 돈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내가 젊었을 때는 바다만 들어가면 문어나 조개들이 넘쳐났어요. 해삼 전복도 많구요. 서울 사람들은 도대체 돈을 쓸 일이 어디에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여기는 집값도 아주 싸요.”
그야말로 자연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외지 사람이니까 바닷가를 산책할 수 있다. 그런데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그는 왜 이런 시각에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일까.
폭포 옆에 살면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고 바닷가에 살면 바다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이 흘러나오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데 지혈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의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진찰 받아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삼성병원을 갔더니 혈액암이라는 거예요. 전이까지 됐다고 해서 방사선치료를 받았어요. 그걸 하니까 요즈음은 어찌나 입술의 한쪽이 찢어질 듯 아픈지 모르겠어요. 의사 말로는 방사선 치료 후유증이라고 해요.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렇게 산책을 다니고 있어요.”
주변을 보면 암 통보를 받고 저세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암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터널인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얼굴을 보니까 대충 인생살이 본전은 찾은 것 같아 보였다.
성경을 보면 인생이 칠십 년이고 근육이 좋아도 팔십 년이라고 했다. 그가 하나님한테 허락받은 연수를 채웠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연세가 좀 들어 보이시는데 어떻게 되세요?”
“저는 1957년생이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데요.”
나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나이를 망각했었다.
“그렇군요. 내가 몇 살 위가 되네요.”
그를 통해 내 나이를 자각했다. 그가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의식의 내면에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올랐다가 사라지는 배우는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이라는 무대에 내보낸 감독이 준 배역을 제대로 해냈던가? 조역 내지 단역을 맡았는데 주인공이 아니어서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었나? 예수의 제자들은 길가의 장님을 보고 저 사람은 왜 저기 저렇게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존재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아픈 사람들도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배역을 맡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인생 5막에서 감독인 그분이 3막에서 내려오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닐까. 막 태어난 아기들은 나오기 싫은 세상 무대에 억지로 밀려 나와 그렇게 우는 것은 아닐까. 그냥 이런저런 상념이 스쳐 지나간 저녁이었다.
이왕 세상 무대에 던져졌다면 주어진 어떤 역할도 받아들이고 잘 해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