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인위적인 기도, 인간적인 기도
시편 109편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시 109:9-13)
아니, 무슨 기도가 이렇습니까? 시편 109편은 원수에 대한 저주로 가득합니다. 다윗이 직접 지었을 수도 있고, 다윗이 편찬했을 수도 있는 이 시편의 시인은 자기 내면의 분노와 상심을 하나님 앞에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렇게 상스러워도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인데 원수를 사랑하려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하는 척하다 보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위선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과 같은 원수를 살려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이 시편의 내용처럼 고백하는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원수 사랑이 천리길이라면,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그 천리길의 한 걸음입니다. 이 한 걸음을 자꾸 건너뛰니까 ‘그런 척’ 할 수 밖에 없는 가식적 신앙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척, 아닌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사 앞에서 자신의 환부와 아픔에 대해 가감 없이 말하고 보여줘야 정확한 처방이 나오는 법입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놓고는 괜찮은 척, 안아픈 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거룩이나 신비를 연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위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야 인간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적이 되는 것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교만이고, 원수를 내가 갚고 말겠다는 것도 교만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갚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09편의 기도가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이 기도야말로 원수 갚는 일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