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고난이 유익할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소록도의 한센인 마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시는 의사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한센인들은 겨울철 난로 앞에서 손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쬐다가 손을 잃습니다. 발에 동상이 걸린 줄도 모르고 계속 일을 하다가 발을 잃습니다. 만약 그들이 고통을 느꼈더라면 손과 발을 지켰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사람은 고난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도리어 고난을 인지하지 못할 때,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갑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기보다 고난을 잊게 만드는 진통제와 환각제가 아닐까요?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는 노력은 대부분 중독으로 이어집니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뿐만 아니라 일 중독, 성 중독, 사람 중독 등 고난을 피하고 싶어서 선택하는 것들에 중독되어 결국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삶이 망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거부하셨습니다. 신포도주는 당시의 진통제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마약, 아편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아편으로서의 종교를 거부하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이고,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고난이 견딜만 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도 여전히 힘겨운 것이 고난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견딜만 한 것은 이미 고난이 아니고 고통이 아니지 않을까요? 견딜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이미 고난이 극복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이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 없는 기도와 응원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가 이 아픔을 잘 견디고 일어나서 언젠가는 자신의 아팠던 때를 회고하며 그 때의 고난이 유익했노라 웃을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