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홍의 시선] 아날로그에 취한 봄날 오후···빨간우체통·공중전화·구두닦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쓰다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갈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채워줬으면
윤석중 시, 홍난파 곡 ‘낮에 나온 반달’ 1절이다.
도시에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살필 때나 하늘을 쳐다보지, 그렇지 않다면 낮은 물론 밤에도 하늘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좀 살만해지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쫓겨서 전후좌우 눈 돌릴 겨를도 이유도 없을 터이다.
더구나 스마트폰이 등장해서 땅도 보지 않고 앞도 보지 않고 걷는데 맑은 날에 하늘을 왜 볼까. 낮에 하얀 반달이 뜬들 관심이나 있겠으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나같이 두리번거리고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은 정말 찾아볼 수가 없다.
절기는 이미 봄을 넘었는데도 여간 쌀쌀하지 않은 날씨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은 채 종종걸음으로 오간다. 그런데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식 인문학 틈새를 찾으려고 애쓰는 나는 하늘의 색상과,구름과, 나무까지 건물의 첨단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문득 한낮 파아란 하늘에서 구름 가듯 떠 있는 반달을 보게 된 것이다.
달인데 달 같지 않은 너무도 여린 순백의 반달이라 보아도 구름의 한 조각으로 지나치기에 십상일 것이다. 아날로그를 찾는다면서 첨단디지털 상징인 스마트폰으로 굳이 낮달을 담고 있는 아이러니는 어쩔 수 없다. 놓치면 다시 못 볼 것 같아서다. 언제 이렇게 우연히 보게 되겠는가.
한국은 지금 살아가는 주변 어디든 첨단으로 뒤덮였지만 삐삐 시대보다 더 이전의 아날로그도 인문학적 소재를 찾는 내 눈에는 들어온다.
매일 오가는 길인데도 오늘 갑자기 눈에 들어온 빨간 우체통. 하얀 반달을 보았을 때 그 순간 마음이 동심으로 초기화가 되어서 돌연 보였을까? 불현듯 편지를 쓰고 봉투에 우표를 침발라 붙이고, 때론 나를 통째로 까발리는 내용일 수 있는 엽서를 써서 동네 길가의 우체통에 넣던 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길에 빨간우체통과 전화 BOX를 보고 아직도 이런 것이 있는 걸 보면 영국이 우리보다 후진국인가 했었는데 우리 동네 우체통을 보니 그 뜻을 이해하겠다.
디지털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아날로그 세대에 대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고 특히 영국의 경우는 의외로 후진 구석이 많아서 아직도 우체부, 전화국 교환시스템, 공중전화와 같은 아날로그식 노동력이 필요한 곳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도 공중전화도 있었구나. 작은 네거리에 있는데 매일 지나치면서도 의식도 관심도 없었다. 부스(booth)안을 보니 다이알 공중전화도 있고 스마트폰 충전기 대여 박스도 있다. 다이알 공중전화를 보았을 때,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쯤은 공중전화 다이알은 돌려보았을 법한데 들어가 본 적도 없다.
당국도 이런 상황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유지하는 것은 배려이겠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한국의 운치(韻致)라고 보는 것이다. 나처럼 잠시라도 낭만에 젖을 수 있고 옛 추억도 소환하여 골치 아픈 세상사에 시달리는 순간을 잠시 잊게 하려는 인문학적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런 낭만에 들떠 내친김에 구두닦이 부스에도 들어가 봤다. 구두 닦는 방법이 전혀 진화되지 않았다. 마치 무형문화재처럼 말이다. 요즘은 구두 닦을 일이 없다. 현업에 있을 때도 구두닦이가 사무실에 와서 구두를 가져가서 닦아오기 때문에 부스에 들어가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느낌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노스탤지어(nostalgia) 인가.
디지털은 신묘(神妙)하지만 차갑다. 아날로그는 정겹고 아름답고 따뜻~하다. 아무리 최첨단 AI 시대가 도래했다지만 세상은 이어령선생이 그렇게 선지자적으로 일갈하셨던 디지로그 시대를 박차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