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어느 부활절의 나의 詩心-라일락꽃’

창틀 너머 라일락 <사진 구본홍>

부엌 창문으로 밖을 염탐하는데
창틀 모기창까지 담쟁이가 벽을 탔다.

바깥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살피는데
라일락이 뒤에서 손을 흔든다.

그 모양이 아름다워
방금 붓을 놓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반세기 아파트라 모기창과 창살이
방충과 방범에만 충실할 뿐
창문의 美學엔 아랑곳없지만
이름다운 것은 아무리 말려도 아름답다.

왠지 모르게 바깥이 따스할 것 같아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그렇게 들락여도 유심히 본적이 없는
부엌창문을 밖에서 보니 너무도 이국적이다.
걷는 순례자들이 찾는 스페인 어느 마을의
고풍스런 알베르게* 담장 같다.

<사진 구본홍>

​그늘진 구석인데 활짝 핀 라일락이
유난히 짙은 봄 내음을 전하고
뉘 집 아이 것인지 그냥 턱 던져놓은
자전거가 화폭의 운치를 더한다.

잎이 먼저 나올세라 다투어 얼굴 내민
봄의 화신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목련 벚꽃
모두 그 급한 성질 못 버리고 금방 시들지만
라일락은 꽤 침착하다. 언제봐도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다.

꽃잎도 폭죽처럼 퍼지지 않고 수수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화폭에 담기 편하게 스스로 구도를 잡고 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이 수수꽃다리라 했던가..

라일락은 같은 봄꽃인데, 다른 봄꽃보다 왠지
사연이 많을 것 같다.
다들 봄꽃을 ‘기다림’으로 찬양하지만,
같은 기다림이라도 라일락은 어딘지 모르게
더 절실한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라일락이 그렇게 오래 견뎌주는가 보다.

봄꽃을 노래한 우리의 대중가요를 보면
김영애의 <라일락 꽃>처럼
너무도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할 때
라일락 꽃이 등장한다. .

홀연히 나타났다 단 하나의 히트곡 라일락 꽃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김영애는 어디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헬스장을 마다하고 동네를 지나 한강을 걷는데
다리가 짧은 <수수꽃다리>라 그런지
향기가 가까이서 참 진하다.
사람에게서 이 향기라면 취하지 않고 견딜소냐.

라일락의 향기에 취하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다른 꽃잎처럼 입도 달콤할까? 싶었다.
한 닢 물었더니 쓰다. 많이 쓰다.
덜 여물어서 그런가 했는데, 원래 그런 모양이다.
꽃말이 옛사랑의 추억, 첫사랑의 추억이라 하더니
겉으론 향기로 아름다운 사랑인 양 뽐내지만
속으론 참 쓰라린 사랑의 아픔을 가졌구나.
그 아픔을 인내하고 있었구나.

또다시 불현듯 십자가의 보혈이 떠올랐다.
쓴맛은 자신이 품고
향기는 만민에게 고루 보내주는 라일락이
예수님을 닮았다. 베드로도 닮았다.
나는 예수님을 닮으려 하면서 향기를 베풀고 있는지…
쓴맛을 뱉는 것이 아닐까?

엉뚱하게 라일락이 나를 구속(救贖)한다.
그래서 라일락이 더 소중하다.

*알베르게 (albergue) :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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