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카타콤의 정결한 어린양
로마시 외곽에 있는 카타콤의 지하교회는 바티칸 광장에 웅장하게 서 있는 베드로성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한, 순교의 핏자욱이 널려있는 고난의 현장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안내 신부는 카타콤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러분은 방금 지상(地上)에서 가장 화려한 성전인 베드로성당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하(地下)의 가장 순결한 성전, 순교의 터전 위에 세워진 진정한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 신부가 믿는 하느님은 바티칸의 화려한 베드로성당보다 카타콤의 초라한 지하교회를 더 바라신다는 설교처럼 들렸다.
구약 시대에 번제(燔祭)의 제물은 사자나 코끼리처럼 강하고 늠름한 동물 또는 독수리나 공작과 같은 용맹스럽고 화려한 새가 아니다. 순하디 순한 소와 양과 비둘기다.
소제(燒祭)의 제물도 두꺼운 껍질로 감싼 곡식 알맹이가 아니라 곡식을 잘게 부순 고운 가루다. 이 작은 제물들이 마치 어떤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처럼 신비하게 여겨진다.
?하나님은 코끼리의 늠름한 위용이나 사자의 날쌘 용맹이 아니라 소처럼 묵묵한 충성과 양처럼 온유한 순종을,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독수리의 비상(飛翔)이나 공작새의 화려한 자태가 아니라 비둘기의 순결한 헌신을, 두꺼운 껍질을 뒤집어쓴 곡식 알맹이가 아니라 그 껍질을 벗고 자기를 갈아 해체(解體)시킨 고운 가루를 바라신다.
이것은 자기정체성을 내어버린 ‘노예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과 겸손을, 이웃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깨닫는 영혼의 자유를 뜻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율법적 성취와 가문(家門)의 신분, 대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화려한 자격과 명예를 한낱 배설물처럼 내버렸다. 그는 아무 보수도 사례도 받지 않고 손수 천막을 짜면서 봉사한 묵묵한 소였으며, 늘 자신을 쳐 복종시킨 온유한 양이었다(고린도전서 9:13~15, 27).
호의호식과 안일함으로 영혼의 긴장을 이완(弛緩)시키지 않은 정결한 비둘기였고,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한 고운 가루였다. 그는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다(고린도후서 11:30).
?바울은 자신이 애써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박식한 아볼로가 뒤늦게 들어와 활동의 공간을 넓혀갔지만, 그와 자존심 싸움을 벌이거나 경쟁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은 후배 아볼로를 고린도교회의 책임자로 남겨두고 스스로 고린도를 떠났다.
아볼로가 유능했다면, 바울은 거룩했다. 바울은 십자가의 어린양 예수의 뒤를 이은 또 한 마리의 피 흘리는 어린양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 위의 풍성한 예물이 아니라 핏자국 어린 순교의 터전 카타콤의 정결한 어린양의 제물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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