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두 ​’믿음’에 관한 여러 해석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생활에 몰두했지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가톨릭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로마를 순례하던 중에 빌라도의 스물여덟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으로 기어올랐다고 한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루터가 계단을 오르던 도중 로마서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천둥처럼 울렸다고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여기의 기록은 구약 하박국서를 가리킨다.(하박국 2:4).

빌라도의 계단(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오르셨다고 전해지는 빌라도의 계단은 16세기에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요한성당(라테란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의 계단에서 루터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나 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킹제임스 성경( KJV)과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고 번역했고, 새 번역 영어성경(NIV)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라고 의역(意譯) 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고 풀어 썼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구절에서 앞의 믿음과 뒤의 믿음을 같은 뜻으로 보는 견해는 일종의 강조어법으로 보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으로 새긴다.

두 믿음을 다른 뜻으로 보는 견해도 여러 가지인데,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의 믿음에서 실천의 믿음으로’라고 해석했고, 루터는 ‘어린 믿음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낮은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라고 읽었다. 칼뱅은 ‘수동적인 믿음에서 능동적인 믿음으로’라고 해석했다.

​한편 신정통주의 신학의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나의 신실함으로’라고 새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하박국서의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이다. ‘아멘’의 원형인 ‘아만’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에무나는 성서에서 대부분 ‘신실함'(미쁘심)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를 통해 우리가 신실한 삶에 이른다’는 칼 바르트의 해석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밝히는 또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루터 신학의 요절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미쁘신) 은혜와 그에 응답하는 신실한(믿음의) 삶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입체적인 뜻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총은 입술의 고백을 넘어 신실한 믿음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종교개혁의 달을 지내면서, 고백과 삶이 일치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르쳐준 신앙의 선진(先進)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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