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지성소와 십자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리며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 떡으로 표상(表象)된 현실의 축복,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적의 축복, 사탄에게 영혼을 팔아넘겨서 얻게 될 화려한 세속의 영화… 이러한 사탄의 유혹들을 예수님은 모두 물리치셨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의 신자들은 예수님이 물리친 사탄의 유혹을 자신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부르고 기름진 경제의 풍요를 하나님의 현실적인 복으로,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물리치는 신비한 기적을 하늘의 축복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세속적 영광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크리스천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영업소의 벽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액자 속 성구(聖句)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보잘것 없어도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는 욥의 친구 빌닷의 확신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마침내 배부르게 될 것(마태복음 5:6)이라는 하늘의 은총과 거의 같은 뜻으로 보아야겠다. 그런데 영업소 곳곳에서 만나는 이 액자가 종종 하늘의 은총보다는 상업적 성공을 바라는 기복의 소원처럼 읽혀지곤 할 때가 없지 않다.

​예수님은 수전절(修殿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솔로몬의 행각을 거니셨다(요한복음 10:23). 성전은 지성소, 성소, 유대인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는데, 솔로몬 행각은 가장 외곽에 위치한 이방인 뜰 주위에 기둥만 있는 회랑(回廊)이다.

지성소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大贖罪日)에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유대인의 뜰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인의 뜰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성서가 영원한 참 대제사장(히브리서 6:20)이라고 선포하는 예수님은 지성소는 물론이고 성소도, 유대인의 뜰도, 여인의 뜰도 아닌 가장 외곽에 있는 이방인의 뜰, 그 소외된 자리 한쪽 곁의 솔로몬 행각을 거닐었다는 것이다.

지성소에도 성소에도 참 대제사장 예수님의 자리는 없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대제사장 가야바와 사제들, 그 지체 높은 직업종교인 무리가 성소의 거룩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성당들 안에서 예수님의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우리 또한 입으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솔로몬 행각처럼 가장 소외된 자리로 예수님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제와 종교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 삶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우리 삶의 지성소에 바르게 품어 지니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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