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수도사 텔레마쿠스의 죽음

콜로세움의 검투사와 수도사 텔레마쿠스

콜로세움의 핏자국

고대 로마의 휴일은 축제일이었다. 특히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환영행사는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아피아 가도(街道)를 뒤덮는 장엄한 개선행진에 이어 루디(ludi)라고 불리는 전차경주가 열리거나 무네라(munera)라는 이름의 검투경기가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벌어지곤 했다.

동료 검투사의 창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패자의 모습에 수만 명의 관중이 열광하는 핏빛 축제일이었다.

​4세기말,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가톨릭을 로마의 국교로 승인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고 그의 두 아들이 동서 로마의 황제가 되어 분할 통치하던 시절의 어느 휴일,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탈리아의 구원자’라는 별칭을 얻은 로마제국 최후의 명장 스틸리코의 개선행사가 열렸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위해 화려한 개선행진과 함께,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검투경기를 콜로세움에서 개최했다. 양쪽으로 갈라선 검투사들이 서로를 향해 무시무시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검투사들이 하나 둘 쓰러질 때마다 관중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검투사들의 주검이 쌓여갈 무렵, 허름한 옷차림의 수도사 한 사람이 관중석 울타리를 넘어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검투사들을 막아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살인을 멈추시오.”

느닷없는 훼방꾼의 등장에 검투사들은 당황했고, 황제도 관중도 모두 경악했다. 잠시 주춤하던 검투사들이 방패로 수도사를 밀어냈지만 수도사는 다시 검투사들 사이로 끼어들며 소리높이 외쳤다. “살육을 멈추시오.”

​흥미진진한 경기가 뜻밖의 사태로 중단되자 화가 난 관중들이 수도사를 야유하며 그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콜로세움 안에서는 군중의 목소리가 황제의 권력을 능가했다. 황제라도 패배한 검투사를 관중의 뜻에 거슬러 죽이거나 살릴 수 없었다.

군중의 아우성이 빗발치자 검투사 한 명이 칼로 수도사의 가슴을 찔렀고, 쓰러진 그의 수도복 위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수도사는 죽어가면서도 ‘살육을 멈추라’는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 절규가 그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야유와 고함으로 떠들썩하던 경기장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다.

​잠시 뒤 호노리우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귀족들도 자리를 떴다. 쥐죽은 듯 적막한 침묵 속에서 관중도 하나 둘 일어나 경기장을 떠났다. 얼마 후 콜로세움 안에는 저 멀리 터키 지역에서 온 수도사 텔레마쿠스의 시신(屍身)만 남았다. 그 성대한 축제일의 검투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아니, 그날의 경기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로마시내 곳곳에 호노리우스 황제의 칙령이 나붙었다. “로마에서 무네라를 금지한다.” 이후로는 누구도 콜로세움에서 사람 목숨을 노리개로 삼는 검투경기를 열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황제 호노리우스의 유일한 업적이다. 그 후 동방의 수도사 텔레마쿠스에게는 ‘사막의 개혁자’라는 별명과 함께 가톨릭 성인(聖人)의 호칭이 추증되었다.

​텔레마쿠스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살인게임을 폐지시키고 숱한 검투사들의 목숨을 살려냈다. 아니, 로마인들의 양심을 살려낸 것이었다. 로마에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영혼을 살린 것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도, 노예 해방의 영웅 스파르타쿠스도 중단시키지 못했던 살인 광란극을 힘없는 수도사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끝장낸 것이다. 콜로세움의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검투경기를 없앤 것은 황제도 정치가도 아니었고, 교황도 추기경도 아니었다. 아무 권력 없는 수도사 텔레마쿠스였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십자가의 희생이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텔레마쿠스의 죽음은 그가 살았을 때보다 더 위대한 영향을 인류에 끼쳤다.”

로마 가톨릭의 수많은 성직자들이 콜로세움의 피비린내에 양심의 코를 틀어막고 있을 때, 변방에서 온 한 수도사가 피에 굶주린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게 만들어 평화의 길을 열었다. 자신의 피로 검투사들의 피를 막아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것이다.

​평화를 원하는가? 피의 희생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정녕 대화와 설득으로 핵(核)폭탄과 미사일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가? 텔레마쿠스는 검투사나 관중들과 대화를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성(理性)이나 선의(善意)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살육의 야만에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저항한 것이다. 저항을 포기한 대화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오늘의 종교와 성직자들이 온갖 불의와 죄악에 무감각해진 이 나라, 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세속에 동화(同化)되어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힘이 없어서인가? 세력이 약해서인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한 사람의 텔레마쿠스가 없어서일 것이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콜로세움은 인생과 사랑에 눈 뜬 젊은 공주가 매력적인 기자와 함께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의 로맨틱한 배경화면으로 등장했지만, 내 휴가철의 콜로세움은 그처럼 낭만적이지 못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피의 경기장, 내 눈망울에는 핏자국보다 더 검붉은 어떤 흔적이 어른거렸다. 피로써 피에 저항한 한 수도사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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