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거듭난 ‘삶’의 대림절, 거듭난 ‘영성’의 성탄절
지금의 이란 북부지역인 고대 파르티아(Partia) 제국의 점성가들, 그 동방박사들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무더위와 칼바람이 살을 에는 한밤의 추위를 견뎌내며, 독충과 전갈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열사(熱沙)의 사막을 수십 일 동안 쉬지 않고 건너와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갔다. 이것이 최초의 대림절이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가 어디에서 탄생하실지 묻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구약 미가서(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서슴없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한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훤히 꿰뚫고 있는 성전종교의 고위 성직자, 제도종교권의 골수 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 종교인들은 성전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가서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 그 동방박사들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베들레헴 시골여관 마구간으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 이렇게 썼다.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할 거야.” 4시에나 올 너에게로 내 마음은 이미 3시부터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미래에 올 ‘너의 다가옴’과 지금 너를 기다리는 ‘나의 나아감’이 현재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예수, 그분께로 나아가는 우리, 그 ‘다가옴과 나아감의 만남’이 대림절의 기다림이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황량한 들판의 목자들에게 첫 번째 성탄전야, 최초의 크리스마스 이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들판에 첫 번째 성탄 찬가, 최초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 ‘Gloria in Excelsis Deo’, 천사들의 영광송이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네 개의 성탄 찬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는데, 그 세 번째 캐럴이 천사들의 영광송이다. 이 영광송을 주제로 비발디·바흐·헨델·모차르트·베토벤 등 여러 작곡가들이 칸타타와 미사곡 등 훌륭한 찬양음악을 만들었다. 우리 찬송가에도 있다. 125장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니…”
성전에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 종교인들은 천사의 영광송을 듣지 못했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만 들었다. 예수가 세례받을 때, 성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성자 예수 위에 나타났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한 자리에 나타나신, 최초이자 유일한 삼위일체의 현현(顯現, Epiphany)이었다. 그 삼위일체 현현은 성전의 지성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광야에 흐르는 시냇가, 요단강변에 나타났다.
동방박사들은 궁궐이나 성전이 아니라 베들레헴 시골여관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가에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사도바울은 저 이방 수리아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다. 메시아를 만나는 자리는 성전이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 우리들 일상(日常) 속 삶의 자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때, 성전경비병들과 미리 암호를 정했다. “내가 가서 입을 맞추는 자가 예수다. 그를 잡아라.” 왜 이런 암호가 필요했을까? 예수님의 옷이나 겉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평범한 서민의 옷차림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성전경비병들이 누가 예수인지 알 수 있게끔 가룟 유다가 예수에게 다가가 그 유명한 배반의 키스를 한 것이다.
반면에, 대제사장의 예복은 매우 화려했다. 가슴에는 흉패를 달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세마포 위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에봇이라는 긴 조끼를 입었다. 마치 가톨릭 교황의 예복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허름한 서민의 옷을 걸친 예수님을 꾸짖었다. 성전의 제사장전승과 광야의 예언자전승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긴장된 순간이다.
가야바가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가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느니라.” 분노한 가야바가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면서 대제사장 예복을 스스로 찢었다. 예수께서 운명할 때 지성소의 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제도화된 성전종교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고, 가야바가 대제사장의 예복을 찢은 것은 ‘제사장전승의 종말’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사도바울이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않는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사람, 인간의 마음속, 우리의 삶 속에 계신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다. “하나님이 새 계명을 너희 속에 두며, 그의 법을 너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돌판에 새긴 모세의 율법은 성전의 지성소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새 계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들 일상의 삶의 자리 안에 있다.
헤롯왕이 46年에 걸쳐 화려하게 증축한 유대교의 상징,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께서 말한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당시에는 돌에 맞아 죽을 신성모독의 중대 발언이었다.
예수보다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폭탄선언을 한다.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너희가 성회를 열고 안식일로 모이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않으리라.” 타락한 제도종교의 성전에서 형식적 종교의식에 몰두하는 제사장전승을 날카롭게 질타하는 광야 예언자의 피 끓는 절규다.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된 장군 티투스의 군대가 주후 70년, 모리아 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통곡의 벽 일부만 남긴 채 깡그리 파괴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슬람의 모스크 ‘알아크사 사원’이 서 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천국의 환상을 본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노라.” 천국에 성전이 없단다. 그 뒤에 요한이 이런 주석을 붙인다. “주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이 성전이심이라.” 예수 자신이 성전이다.
사도바울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신앙인 각자의 몸이 성전이란다. 성전이 없는 천국에 헌금이 있을까? 설교가 있을까? 전도가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천국은 이 땅에서의 가치가 송두리째 뒤집히는 곳, 일체의 가치가 전도(轉倒)되는, 새로운 영역이다. 다만, 천국에서도 계속되는 것이 하나 있겠다. 찬양이다. 천국은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곳일 거다. 나도 천국 찬양대원이 되기를 소원한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전 건물, 성당 건물, 교회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내 마음이, 우리의 일상 속 삶의 자리가 그 어디든 천국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예수가 말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도래하고 있다. 현대는 종교다원주의 시대다. ‘현실 초월과 선험적(先驗的) 세계를 지향하는 문화체계’를 모두 종교라고 부른다. 기독교만이 아니다. 불교도 종교, 이슬람교도 종교, 모두 제도종교다.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수많은 신전과 신상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네테인들이여,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宗敎性)이 많구나.”
종교들에는 모두 종교성이 있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그 종교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깊은 영성(靈性)으로 나아간다. 종교성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나 초월의 세계로 올라가려는 상승(上昇) 욕구’라면, 영성은 ‘초월이 우리의 일상 안으로, 삶의 현실 속으로 내려오는 하강(下降)의 깨우침’이다.
하늘 영광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의 하강을 케노시스(κενοσι?) ‘자기 비움’이라고 한다. 초월자가 우리 삶 속에, 우리의 일상 안에 들어오신 성육신, 그것이 예수의 ‘자기 비움’이다. 동방박사들이 성전의 지성소, 그 초월의 성역(聖域)이 아니라 시골여관 말구유, 그 일상의 자리에서 메시아를 만난 것처럼…. 들에 핀 한 송이 백합화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처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서 창조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상에서 초월을 만나는 깨달음이 거듭난 영성이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와 동행하는 거듭난 일상,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일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 대상인 타자(他者)를 필요로 한다. 자녀가 있기에 부모 사랑이 있고, 아내와 남편이 있기에 부부애가 있다. 애달픈 짝사랑에도 대상이 있다. 내 안타까운 사랑에 목석(木石)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그 야속한 타자 때문에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젊은 베르테르가 샬롯테를 짝사랑하는 열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절대타자(絶對他者)라고 말한다. 타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복음도 없다.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나치에게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예수를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했다. 더 나아가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다”라고 주장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즘 인터넷 공간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들어가면서 정작 자기 마음속은, 자기 일상의 삶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내면의 성찰이 없는 ‘자아 상실’의 시대다. 저 옛날,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을 타자로 대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안에서 낙심하고 불안해하는가?” 자기 영혼을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르면서 타자로 바라본다. 이것은 자아의 분열이 아니다. 자아의 성숙이다.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비추어 내 마음을 읽고 내 일상의 삶을 돌아보는 자아의 성찰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오른편 강도에게 말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가 강도와 함께 낙원에 들어간다니, 강도와 공범도 아닌데···. 어울리는 동행일까? 예수와 강도, 그 어울리지 않는 타자와의 동행이 곧 ‘구원’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 종교인들은 결코 강도와 함께는, 그 타자와 함께는 낙원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인 열심당원 시몬은 가슴에 늘 칼을 품고 다니는 시카리오(sicario), 무장독립투사였다. 그 시카리오는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세리 마태를, 마치 친일파 대하듯, 친로마파 반민족주의자라고 증오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타자들이 함께 모여 동행한 것이 예수의 제자공동체, 최초의 신앙공동체였다. 그 예수 신앙공동체에는 성전도, 교회당도 없었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전부 ‘우리’, 나와 타자가 함께 있는 ‘우리’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敎父)의 말처럼, 나 혼자서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는 ‘나의 소원’도 없다. 모두 ‘우리의 소원’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소원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친 우리의 소원에는 해방이나 독립이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 오직 그것뿐이다.
<지각(知覺)의 현상학>이라는 책을 쓴 메를로 퐁티를 ’몸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정신에 대한 육체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최초의 몸 철학자는 퐁티가 아니라 2천년 전의 사도바울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소와 양을 잡아 그 시체로 드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 몸을, 우리 일상의 삶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해석을 덧붙였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 당시는 영혼과 육체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헬레니즘의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이 지배했다. 플라톤은 아예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로 영혼과 육체의 일치를, 초월과 일상의 하나 됨을,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아닌 영육불이(靈肉不二)를 말하고 있다. 제도화된 성전종교의 형식적인 제사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몸이, 초월과 하나 된 일상의 삶이 곧 영적 예배라는 뜻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을 경험주의의 원조(元祖)라고 한다. 그런데 경험주의의 진짜 원조는 베이컨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못 믿었던 의심꾸러기 제자 도마였다. 도마가 예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주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 난 뒤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에게 ‘하나님’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바친 최초의 신앙고백이다. 그 어마어마한 최초의 신앙고백을 수제자(首弟子) 베드로가 아니라 의심꾸러기 경험주의자 도마가 한 것이다.
길거리에서 두꺼운 성경책을 가슴에 꼭 껴안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분들이 있다. 가슴도 오른쪽 가슴이 아니라 왼쪽 가슴이다. 심장이 왼쪽에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분이 어느 날 길거리에서 나에게 “예수 믿으세요. 안 믿으면 지옥 가요”라고 했다. “예수 믿어 천당 가라”는 말이 아니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말이었다. 아마 내가 지옥 갈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또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전혀 교인처럼 보이지 않는 않은 분이 있다.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도 안 보이고, 두꺼운 성경책을 왼쪽 가슴에 심장 가까이 껴안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분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절망하거나 분노하는 적이 없고, 자기 생활도 그리 넉넉지 않은데 어려운 사람들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도우며 살아간다. 감동한 회사 동료가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그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분이 대답한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군요.”
그 말을 들은 동료가 이렇게 고백했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나도 믿어보고 싶네요.”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는데, 오히려 그 동료가 먼저 “당신이 믿는 예수님, 나도 믿고 싶다”는 고백을 스스로 한 것이다. 이 고백을 이끌어내는 삶이 신앙인의 전도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느니라.” 히브리서(書)에 나오는 말씀이다. 날카로운 검으로 혼과 영을 찌르고, 예리한 칼로 관절과 골수를 쪼개면 어떻게 될까? 그냥, 죽는다. 혼과 영을 찌르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데, 어떻게 살겠는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는 ‘와서 복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와서 죽으라’는 것이다.” 본회퍼 목사의 말이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하신다. 옛사람 종교인은 죽고, 새 사람 신앙인으로 거듭나라고 명한다.
사도바울이 경고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미 구원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던지는 두렵고 떨리는 경고다.
십자가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지 않았다. 십자가는 성문 밖 광야로 나아가는 골고다 언덕에 서 있었다. 구원의 십자가는 지금도 성문 밖에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의 광야 같은 삶의 자리 안에 서 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진정한 신앙은 모든 종교가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밥을 굶고, 긴 긴 밤 꼬박 새우는 철야 금식기도가 한낮의 일상적 삶을 대신하지 못한다. 많은 헌금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대신할 수 없다. 예수가 말한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금식기도와 헌금 봉헌과 주일예배와 교회 행사들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에서, 교회 밖의 세상에서 착한 행실과 선한 삶으로 타자들에게 복음을 나타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우리는, 성전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같은 종교인인가? 아니면, 아기 예수께로 광야를 건너 힘겹게 나아간 저 첫 번째 대림절의 동방박사들 같은 일상 속 삶의 신앙인인가?
이번 대림절, 성탄절이 우리의 일상과 메시아의 초월이 하나로 만나는 거듭난 삶의 대림절, 거듭난 영성의 성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우근 변호사 이화여대 강연 ‘성전을 헐어라’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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