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위대한 멈춤’의 승리자들

암스트롱(왼쪽 넘어져 있는 선수)와 울리히(오른쪽 하늘색 상의)


암스트롱은 빠르게 달렸고, 울리히는 바르게 달렸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흥미로운 사이클 경기는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경기다. 매년 7월 약 3주 동안 프랑스 전역과 인접국의 4000km를 전 세계 쟁쟁한 사이클 선수들이 앞을 다투며 질주한다.

100년 훌쩍 넘는 투르 드 프랑스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챔피언은 고환암의 고통을 이겨내고 1999년부터 내리 7년을 연속 우승한 미국 선수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이었다.

​2003년 투르 드 프랑스 경기에서 연속 5연패를 노리며 질주하던 암스트롱이 뜻밖에도 구경꾼의 가방에 걸려 넘어지는 어이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챔피언인 암스트롱에게는 절망의 순간이었고, 그와 숙명의 라이벌이자 만년 2등인 독일 선수 얀 울리히(Jan Ullrich)에게는 절호의 기회임이 분명했다. 암스트롱이 넘어져 있는 동안 울리히는 페달만 계속 밟으면 그냥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울리히는 넘어진 암스트롱 옆에 자기 사이클을 세우고는 그가 일어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뒤 암스트롱이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울리히는 그제야 페달을 밟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울리히는 또다시 2등에 머무르고 말았다.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바보로 여기지 않았다.

​승부 조작도 서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에서 불운하게 넘어진 라이벌이 다시 일어서기를 넉넉히 기다려 준 울리히의 배려를 세계의 스포츠팬들은 ‘위대한 멈춤’이라고 극찬했다.

암스트롱은 빠르게 달렸고, 울리히는 바르게 달렸다. 아니, 바르게 멈췄다. 그 차이는 몇 년 뒤 뜻밖의 결과로 나타난다. 암스트롱이 그동안 금지약물을 복용해 온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국제사이클연맹이 그의 모든 수상 실적을 박탈한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렀을 때 파라오가 기마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허둥대며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지도자 모세가 선포한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야훼의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14)

모세의 선포에 따라 발걸음을 멈춘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고, 멈추지 않은 채 마냥 달려오던 파라오의 기마병은 모두 홍해에 빠져 수장(水葬)되고 말았다.

​안식일(安息日)을 히브리어로 사바트(ָׁתבַש)라고 한다. 사바트는 ‘쉬다, 멈추다’라는 뜻이다.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한 신이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단순한 정지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일을 그치고 신의 일을 기다리는 멈춤의 시간, 내 발걸음을 거두고 신성한 손길을 갈구하는 소망의 때라는 뜻이다.

​고대 유대교 랍비들은 ‘천지창조가 끝난 일곱째 날에도 또 다른 창조가 있었다’고 믿었다. 안식일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안식은 일상의 일을 그치고 편안히 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수평적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구별되는 위대한 멈춤의 시간, 수직적으로 다가오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신성한 시간으로 창조된 ‘신의 날'(Kol Nidrei)이다.

​달려야 할 때 달리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만,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모르고 줄곧 달리기만 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 울리히는 멈춤으로 진정한 스포츠맨이 되었고, 암스트롱은 내달리기만 하다가 가짜 챔피언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멈춤의 자리에서 신성한 기다림을 통해 구원에 이르렀고, 파라오의 군대는 멈출 줄 모르는 채 마냥 달려가다가 멸망의 자리에 이르렀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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