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거듭난 인격, 변화된 일상만이 부활의 삶을 증명”

연례적(年例的)인 부활절 연합예배나 대규모 종교의식이 부활의 삶을 대신하지 못한다. 장중한 칸타타(cantata)와 엄숙한 성례전(聖禮典)은 부활의 기념일 뿐,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거듭난 인격, 변화된 일상만이 부활의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사진은 2019년 4월 21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부활절이 다가온다.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명절이다. 예수가 만약 불멸의 신(神)이라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仁子)’이라고 부른 에수가 진정 사람이라면, 어떻게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가? 합리적 이성주의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다.

신이 사람을 창조했다면, 신 스스로도 사람이 될 수 있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의 창조를 믿는다면 부활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창조를 믿는다는 뜻이요,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신의 창조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활은 과학이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성(靈性)의 차원에서 초월적으로 만나는 실존의 ‘진실’이다. 영성은 이성과 과학을 넘어 초월을 지향한다.

이성의 문은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의 계시 앞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는 이성은 더 이상 이성적이지 않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줄 아는 것이 ‘열린 이성’이다. 증명되지 않는 수학공식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 공식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과학적 이성으로 공식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누가 사랑과 양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가? 사랑과 양심의 존재는 논리적 생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 삶 속에서 엄연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사랑이 정녕 아메바에서, 양심이 진실로 아미노산에서 진화된 것인가? 어떤 진화론으로도 아메바에서 사랑의 희생을, 아미노산에서 양심의 가책을 추출해내지 못한다.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 밤새워 번민하는 죄인의 양심은 어떤 화학공식으로도 증명될 수 없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는 어떤 심리학으로도, 어떤 두뇌과학으로도 확연히 ‘증명’되지 않지만, 저 공중의 해와 달과 별들처럼 선명하게 존재한다. 아니, 해와 달과 별들처럼 끊임없이 운동하며, 움직이며 ,꿈틀대고 있다.

​요한복음은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떡과 생선을 불에 구워 제자들과 함께 먹었다고 증언한다(요한복음 21장). 죽었다가 부활한 신의 아들이 아직 죽지도 않은 인간들과 함께 떡과 생선을 구워먹었다니, 매우 난해한 기록이다.

영혼은 떡이나 생선 따위를 먹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굳이 불에 구워 먹는 ‘문화적’ 방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겠다. 영혼은 살과 뼈가 없다. 못 자국과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영혼도 없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의 몸에는 못과 창 자국이 있었고, 생선을 불에 구워먹는 살과 뼈의 육체를 지녔다. 부활의 몸은 순수한 영혼도 아니고 순수한 육체도 아니라는 뜻일 게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

​3년 동안이나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부활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초월적 존재양식이요, ‘밝아진 눈'(누가복음 24장 31절)만이 볼 수 있는 초월의 신비이기 때문이리라.

부활은 ‘영과 육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영육불이(靈肉不二), 그 온전한 신의 형상(Imago Dei)이 역사 안에서 현실화된 ‘신의 현현(顯現 Epiphany)’으로서만 이해되고 믿을 수 있는 기적이다.

​부활이 역사 안에서 현실화된 신비라면, 그것은 신조(信條)가 아니라 실존의 삶이어야 한다. 나날의 일상에서 부활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 거듭난(born again) 영성이다. 그래서 부활은 예배와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 삶과 인격의 실존적, 일상적 차원으로 옮겨간다.

부활의 삶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듭남’이다. 부활의 신앙고백이 인격과 삶으로 육화(肉化)되지 못한 채 제도종교 안에서 신조로서만 고백되는 것은 맹신(盲信)을 넘어서지 못한다. 부활의 신앙고백만으로 마치 거듭난 부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 두렵다.

​연례적(年例的)인 부활절 연합예배나 대규모 종교의식이 부활의 삶을 대신하지 못한다. 장중한 칸타타(cantata)와 엄숙한 성례전(聖禮典)은 부활의 기념일 뿐,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거듭난 인격, 변화된 일상만이 부활의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부활의 신조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의 인격을 얼마나 변화시켰으며, 그의 삶을 어떻게 쇄신하고 있는가?” 이것만이 나날의 삶 속에서 부활을 증거하는 생생한 표지(標識)라 믿는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사도 바울의 고백… 신조가 아니라 날마다의 삶속에서 솟아난 부활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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