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강자의 책임감, 권력의 도덕성

<레 미제라블>의 독자들은 정의의 수호자 자베르 경감이 아니라 절도범 장발장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 강자인 자베르의 정의감이 약자인 장발장의 모진 삶을 더욱 모질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삶의 막다른 자리에서는 정의감이 아니라 인간애가 빛을 밝힌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국내 기획 제작 공연된 뮤지컬 <레미제라블>


“삶의 막다른 자리에서는 정의감이 아니라 인간애가 빛을 밝힌다”

법정에는 다섯 개의 시선이 뒤섞여 흐른다. 범죄자를 질책하는 검사,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 그를 위해 변론하는 변호인, 정의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 그리고 방청인의 눈길이다. 방청인들은 법정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그저 구경꾼처럼 재판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투표소 모습은 다르다. 유권자들은 투표소에서 구경꾼도 아니고 방청인도 아니다. 투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주권자다. 방청인이 피해자나 그 가족이라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방청인들은 강자인 검사가 약자인 피고인을 매몰차게 추궁하면 할수록 피고인에게 측은한 마음을 품게 된다. 피고인이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아니라면…

​어린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힌 장발장은 여러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19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또다시 성당에서 은그릇를 훔쳐 나오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힌다. 장발장이 죄가 없어서 미리엘 신부가 그를 측은히 여겼던가?

미리엘 신부는 검사도, 판사도 아니고 방청인도 아니었다. 신부는 변호인이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성직자의 입으로 경찰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장발장을 감쌌다. <레 미제라블>의 독자들은 정의의 수호자 자베르 경감이 아니라 절도범 장발장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 강자인 자베르의 정의감이 약자인 장발장의 모진 삶을 더욱 모질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삶의 막다른 자리에서는 정의감이 아니라 인간애가 빛을 밝힌다.

​국민의 눈에는 강자의 작은 허물이 약자의 큰 잘못보다 더 나쁜 것으로 비쳐온다. 유권자는 강자와 약자를 똑같은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강자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강자의 책임감, 권력의 도덕성 때문이다.

‘대파 한 단 값 875원’ 발언이 ’10억원대 부정대출’이나 ‘궁중 에로 전문가’의 천박한 막말보다 더 욕먹을 일은 아니다. 대통령 부인의 명품백 수수나 출국금지된 피의자의 외교사절 임명도 자녀의 표창장을 위조·행사한 범행보다 더 매섭게 비난받을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렇지만 강자의 일탈이요 국정을 책임진 권력자의 허물이기에 더욱 큰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민심이다.

민심을 무시하는 정치는 설 땅이 없다

​야당은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까지 선거운동에 함께 나섰지만, 여당은 공천탈락자들이 무소속으로 나와 자당(自黨) 표를 갉아먹었고 참신한 정치 신인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한 중진도 없었다. 이기심과 안일한 보신(保身)주의가 몸에 밴 탓 아닌가?

피고인인 야당 대표를 2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나지 않은 터에 정부 요직을 검사 출신들로 채운 대통령은 자신이 아직도 검찰총장인 듯 착각하고 있지 않나 궁금하다. 검사라면 법정에 갈 일이지 대통령 관저에 들어갈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이상, 엘리트 검사의 근엄한 법복일랑 벗어 던지고 땀냄새 짙게 밴 서민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여당은 민생안정과 국정쇄신을 제쳐둔 채 이·조(李·曺)심판론을 들고나와 야당 후보자들의 범죄혐의를 추궁하는 검사의 역할에 치중했고, 그럴수록 투표소의 많은 유권자들은 그 범죄혐의자들을 변호인처럼 두둔했다. 단순히 진영논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범죄혐의를 받는 후보자들이 강자로부터 매몰차게 추궁당하는약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투표소는 법정이 아니고, 주권자는 방청인이 아니다. 법정을 정치의 도구로 쓰는 정치재판, 투표소를 사법기관처럼 이용하는 민중재판은 모두 민주주의를 어지럽히는 독선의 정치다. 여당은 법정과 투표소를 혼동했다. 법정은 판사와 검사가 주도하는 엘리트들의 무대이지만, 투표소는 민초들이 주권을 행사하는 서민의 무대다. 사법정의는 법정에 맡겨야 한다. 범죄척결은 투표소의 몫이 아니다.

​엘리트의 오만을 증오하는 서민들은 강자에게 쫓기는 약자를 옹호한다. 약자가 얼마나 부도덕한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상가 메스트르(J. de Maistre)는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지적했다.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것이 선거제도의 본질적 한계다.

그렇지만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 않는가?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권력을 휘두르는 귀족정치가 아니다. 평민들이 민심으로 이끌어가는 서민정치다. 분별없이 유권자에게 아부나 하라는 말이 아니다. 강자의 오만을 버리고, 날카로운 정의사회를 넘어 인간애 따뜻한 상생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입권권력을 장악하고 의회의 강자가 된 야당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정치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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