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용서는 가장 신성한 승리다”…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금 계신다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윤봉길 의사의 훙구공원 폭탄투척, 고종황제 강제 양위(讓位)에 대한 동우회(同友會)의 반대시위 등 여러 항일독립투쟁에 관련된 혐의로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 중에 숨을 거둔 도산(島山) 안창호는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안창호 선생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형사법을 처음 공부하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머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금언(金言)이 하나 있다.

“용서는 가장 신성한 승리다!”

독일 시인 실러(Friedrich von Schiller)의 말인데, 법학도의 귀에는 “용서보다 더 무거운 형벌은 없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법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 ‘모순의 형벌론’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은 삶의 진실로 깨우쳐온다.

​​ 불의하고 부패한 사회에서는 정의감이 모든 것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용서는 성서에나 있는 추상적 수사(修辭)쯤으로 여겨질 뿐, “차라리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사형수 한 명을 처형해야 한다”는 칸트의 서슬 퍼런 정의론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아우슈비츠의 나치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 여성에게 누군가 물었다. “독일인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유대인 여성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복수심 따위로 내 인생을 파멸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엔 내 삶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우니까요.”

나치 유대인수용소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도덕과 정의를 내세우며 “나치 만행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흥분하는 상황에서, 정작 그 피해 여성은 용서라는, 정의보다 더 높은, 도덕보다 더 고결한 봉우리를 오르고 있었다. 여생을 복수의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것은 자기 삶을 허비하는 일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을 게다. ‘기억하되 용서하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수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윤봉길 의사의 훙구공원 폭탄투척, 고종황제 강제 양위(讓位)에 대한 동우회(同友會)의 반대시위 등 여러 항일독립투쟁에 관련된 혐의로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 중에 숨을 거둔 도산(島山) 안창호는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 자체의 ‘민족개조론’을 부르짖었다. 신앙인은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앙인에게 용서는 ‘정의의 권리’가 아니라 ‘사랑의 의무’다.

​사랑이라는 뜻의 아모르(amor)는 죽음(morte)이라는 단어에 부정(否定)의 접두어(a)가 붙은 합성어다.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니 ‘사랑은 삶, 미움은 죽음’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이 된다.

​ 물론 용서는 참회를 전제로 한다. 신(神)은 ‘회개 없는 헤픈 용서’를 약속한 적이 없다.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신성한 사랑이다(요한1서 1:8~10) 참회가 가해자의 회개라면, 용서는 피해자의 회개라고 할 수 있겠다.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의 돌이킴, 피해자의 용서는 그 참회의 고백이다. 미움을 용서로 바꾸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참회도 용서도 알지 못한다.

​무릇 나날의 삶속에서 남의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을 셀 수도 없이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슬픈 모습이다. 이 슬픔 앞에 정직하다면, 모름지기 스스로 남을 용서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만일 신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신보다 더 높은 법정을 설치하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루이스(C. S. Lewis)의 통찰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기원보다 우리의 용서가 더 앞서야 한다.’는 매우 어렵고 두려운 가르침을 남겼다(마태복음 6:12 주기도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유대인 여성처럼 ‘기억하되 용서할 수 있는’ 미덕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위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다. 우리의 죄과(罪科)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용서, 그 어설픈 하나님의 기억력 말이다.

피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피해자보다 더 거친 목소리로 처벌과 응징을 외쳐대는 황량한 분노의 시절, 하나님의 엉성한 기억력이 어느 때보다 마음 깊숙이 파고든다. “내가 너희 죄를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31:34)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