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靈)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리니, 바로 지금이 그때다.”(요한복음 4:23)

질문은 예배의 장소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인지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인지를 묻는 것이었는데, 예수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때’로 대답한다. 공간의 물음에 시간으로 답한 것이다.

그 시간은 바로 ‘지금 이때’다. 지금 이때의 장소는 ‘여기’일 수밖에 없다. 예배의 시간은 지금이요, 예배의 장소는 여기다. 영과 진리는 특별한 시간이나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여기’(hic et nunc)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제도종교는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고 예배의 장소, 의식(儀式)의 공간을 성스럽게 여긴다. 중세를 핏빛으로 물들인 십자군전쟁은 신성한 공간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손에서 되찾으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종교전쟁이었다. 제도종교의 왕좌를 누리고 있던 가톨릭 교황청은 바티칸을 눈부신 건축과 정교한 조각, 빼어난 그림들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르네상스의 천재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을 백발노인으로 표현했다. 성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고 명했지만, 제도종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시각예술로, 정체된 공간예술인 미술로 형상화한 것이다.

?시간은 역사와 변혁을 이끌어내고, 공간은 안정과 번영을 약속한다. 안정과 번영은 물신(物神)의 축복이다. 국가권력은 궁전과 영토라는 공간을, 종교권력은 성전과 교구(敎區)라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절대적 종교권력에 저항한 마르틴 루터가 귀로 듣는 청각예술, 선율을 따라 흐르는 시간예술인 음악에 심취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성(靈性)의 신비 속에 숨어계시는 분이다(이사야 45:15).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출애굽기 33:20)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쉐마 이스라엘(??? ?????).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기 6:4) 듣는 것은 귀의 몫이다. 귀는 헬라어로 우스(ο??)인데, 하늘이라는 우라노스(Ο?ραν??)에서 파생된 단어다. 하늘의 소리,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뜻일 터이다.

종교인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하지만, 신앙인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바로 ‘지금 여기’가 눈을 감고 귀를 열어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다. “귀 있는 자여, 들어라.”(마태복음 11:15 요한계시록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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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인 성막은 특정한 공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었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백성의 무리와 함께 이동하던 천막이었다. 유랑하던 성막이 번영한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붙박이 건물로 탈바꿈한다. 흐르는 시간을 정지된 공간 안에 가둔 것이다.

“성전을 허물어라.”(요한복음 2:19) 예수의 놀라운 발언이다. 신앙인 자신이 곧 성전이요(고린도전서 3:16) ‘지금 여기’의 모든 일상이 예배의 시간이며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는 성과 속의 구별이 없다.

?세속사(世俗史)의 시간을 등지고 구속사(救贖史)의 종말을 바라보는 제도종교는 스스로를 성전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가둔다. 이것이 제사장전승이다. 속세의 거친 광야를 떠돌며 공의와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전승은 성전 제사장들의 핍박을 받으며 고난으로 이어져 왔다.

그 고난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메마른 들과 험한 산, 시골 동네와 이방인 마을이 예수의 삶의 자리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가 있었던 곳은 제사장들의 성소도, 대제사장의 지성소도 아닌 솔로몬 행각이었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가장 외곽에 있는 이방인의 뜰 주위에 기둥만 세워진 회랑(回廊)이다. 거기서 예수가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했고, 예수는 그곳을 떠나 다시 광야로 나아갔다. 성전 외곽의 기둥조차 예수의 자리는 아니었다.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된 자리는 어떤 신성한 공간이 아니다. 그가 숨 쉬고 살아간 모든 시간, 모든 장소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다. 예수는 교리나 종교의식, 교단이나 성직제도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건물의 조형미와 장중한 의식에 집착하는 것은 특정한 공간이나 눈에 보이는 형상을 성스럽게 여기는 물신숭배와 다름없다. 그것은 종교의 일일 뿐 신앙의 일이 아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악보

종교인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어 하지만, 신앙인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바로 ‘지금 여기’가 눈을 감고 귀를 열어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다. “귀 있는 자여, 들어라.”(마태복음 11:15 요한계시록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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