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마음에 찔려’ 나타나는 두가지 반응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신앙에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성서를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읽지 않고 제사장과 서기관의 마음으로 읽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rgen Moltmann)의 탄식이다. 종교의 입술로 전하기만 할 뿐, 신앙의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누군가의 충고를 듣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의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 충고에 겸허히 귀 기울이며 스스로 반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바득바득 이를 갈며 반발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나쁜 짓을 자꾸 저지르는 어린 아이를 나무라면 하던 짓을 곧 그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짓을 한 번 더 해보고야 마는 아이도 있다. 인간의 자생적(自生的)인 자존심 탓일 게다.

한 번 더 해보고라도 그치기만 한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문제는, 그치기는커녕 마냥 대들기만 하는 경우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적(原罪的)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성향 때문에 많은 가정과 교육현장들이 고뇌로 가득 차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논쟁을 지켜보노라면 공통된 모습 하나를 자주 만나게 된다. 사리를 따져들어 가다가 어느 한 쪽이 옳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 이렇게 대들기 시작한다.

“왜 반말을 하느냐, 왜 삿대질을 하느냐, 네 나이가 몇이냐, 너는 얼마나 잘 났냐, 너나 잘 해라.”

논쟁의 핵심은 사라지고, 그 과정에 있었던 엉뚱한 흠집을 들춰내는 치사한 싸움으로 변질되고 민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는 ‘마음에 찔려…’라는 표현이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백성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해야 할까?”하며 탄식한 일이고(2:37), 다른 하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려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건이다(7:54).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는 그 전개방식에 서로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모두 유대교 율법신앙의 허구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또한 그 설교들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과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이 모두 ‘마음에 찔려’ 나타난 점도 같다.

그런데 백성들의 반응은 반성과 참회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반발과 적대감으로 달리 나타났다. ‘마음에 찔려’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뜻이다(κατενυγησαν την καρδιαν, διεπριοντο ται καρδιαι).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만큼 양심에 가책을 받고도 어떻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만큼'(공동번역) ‘이를 갈며 격분'(표준새번역)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베드로의 설교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령의 감화(感化)로 마음을 열 수 있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그보다 상당히 뒤의 일이어서 그렇지 못했다고…

이 설명에 따르면,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성령이 강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책임회피로 귀결되고 만다. 이 설명이 나쁜 것은, 회개의 필요성은 성령강림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성령강림 이전에도 회개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크게 질책했다(마태복음 23장).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일반 백성이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 이유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재림한 예수를 꾸짖는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예수여, 그대는 그대의 모든 것을 이미 교황과 우리 사제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백성들은 신앙의 자유를 우리의 발밑에 갖다 바쳤다. 우리는 그대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그대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제들의 것이다. 재림이니 뭐니 하는 따위로 다시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의 삶의 자리(Sitz-im-Leben)와 성직자들의 삶의 자리를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예수는 인간에게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주었지만, 사제와 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내세워 민중에게서 영혼의 자유를 빼앗고 그 위에 군림했다. ‘예수와 아무 관계없는 예수교, 그리스도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교’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렇게 질책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베드로의 설교에 찔린 백성들의 마음은 참 자유를 향해 열려진 목마르고 가난한 영혼이었지만, 스데반의 설교에 찔린 대제사장과 종교인들의 마음은 현실적 욕망의 철문으로 굳게 닫힌 병든 인격이었다. 그 오만한 인격, 누추한 성품이 폭로되자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친 것이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신앙에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성서를 가난한 자의 마음으로 읽지 않고 제사장과 서기관의 마음으로 읽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rgen Moltmann)의 탄식이다. 종교의 입술로 전하기만 할 뿐, 신앙의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오늘, 누군가의 올바른 충고가 우리의 마음을 찔러올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뉘우치고 있는가, 아니면 부득부득 이를 갈며 반발하고 있는가? 그 반응이 바로 우리의 인격과 사람됨을 헤아리는 가늠자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