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민주사회의 평형수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영국 작가 콜린 윌슨(Colin Wilson)은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흐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헤르만 헤세 등 문인 철학자 예술가들의 삶을 분석하고 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불렀다.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평균 3.5% 정도라고 한다. 그 미미한 소금기가 드넓은 바다를 두루 정화(淨化)하면서 무수한 해양생물들을 넉넉히 살아 숨 쉬게 한다. 소금기가 너무 많으면 생명이 살 수 없는 독한 물이 되고 만다. 염분농도가 31.5%에 이른다는 이스라엘의 사해가 그렇다.

인생은 고해(苦海)… 우리의 삶은 고통의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와도 같다. 그래도 거기서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다의 염분 같은 정화의 촉매제가 삶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 정화제는 희망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사랑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괴로운 세상살이를 이어나갈 에너지도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희망보다 사랑보다 더 소중한 정화의 촉매가 있다. 탐욕과 거짓의 쓰레기더미를 뚫고 나오는 자정(自淨)의 목소리, 바닷물의 소금기와도 같은 진실의 외침이다.

그 진실의 목소리는 사회의 권력층이나 시대의 지배계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의 외침으로 시대와 사회를 정화하는 것은 이름 없는 소수(少數)의 무리, 소외된 양심의 목소리다. 그것은 대중의 오해, 권력의 박해 속에서 목숨 걸고 진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광야의 소수였다.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영국 작가 콜린 윌슨(Colin Wilson)은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흐 카프카 카뮈 사르트르 헤르만 헤세 등 문인 철학자 예술가들의 삶을 분석하고 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불렀다.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자 ‘병들어 있는 세상에서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면서 ‘자기가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아웃사이더는 ‘내면을 탐구하는 데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믿기에 대중사회의 인사이더(Insider)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들 아웃사이더에 의해 정화되고 변혁되고 진전되어 왔다.

“나는 내 삶을 커피 스푼으로 측정해 왔다.”(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T. S.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보잘것없이 작고 가벼운 커피 스푼으로 제 삶을 되질하는 행위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대중사회의 많은 인사이더들이 인생을 그처럼 가볍게 낭비하며 살아간다. 하이데거가 비본래적 실존(uneigentlich Existenz)이라고 부른 ‘잡담, 호기심, 애매함’으로 가득 찬 무의미한 일상이다.

비본래적 실존의 덧없는 일상을 벗어나 본래적 실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방인들이 있다. 세상을 광야처럼 건너는 소수의 아웃사이더들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끝내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면서 진실의 길을 찾아 나섰던 톨스토이의 탄식이다. 이런 통찰력과 진실에의 갈증을 지닌 치열한 정신이 제 삶을 커피 스푼 따위로 가벼이 측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가톨릭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가 화형대의 장작더미 위에서도 지동설(地動說)의 믿음을 버리지 않자, 예수회 사제들은 그의 혀와 입천장을 쇠꼬챙이로 꿰뚫고 발가벗긴 채 불태워 죽였다.

혹독한 핍박과 고난을 기꺼이 무릅쓴 저 진실의 순교자들을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The Creative Minority)라고 이름 지었다. 종교탄압을 피해 조국 프랑스를 탈출한 뒤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정밀공업과 산업혁명의 기틀을 다진 위그노(Huguenot), 국교(國敎) 신봉을 강요하는 국왕의 칙령을 거부하고 북미대륙으로 건너가 부모형제의 주검 곁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린 청교도들도 그 창조적 소수였다.

다수결 원칙이 지배하는 양적 민주주의(量的 民主主義, Quantitative Democracy)는 다수 인사이더들의 충동적 감성, 대중의 집단적 광기에 휘둘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감성과 광기를 절제하는 균형추로서의 질적 민주주의(質的 民主主義, Qualitative Democracy)가 필요한 이유다. 민주주의라는 배의 평형수 역할을 하는 균형추가 대중사회의 아읏사이더인 창조적 소수다. 평형수가 없으면 배가 옆으로 기울어 침몰하게 된다.

다수 유권자의 지지로 권좌에 오른 대통령이 평형수 같은 소수의 쓰디쓴 충언을 내치고 가족이나 밀실 측근의 나긋나긋한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면, 국회 다수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민생 돌보기를 제치고 오로지 특정인 한 사람 돌보기에 온갖 입법권력을 휘두른다면, 그것은 양적 민주주의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반민주적 후퇴요 질적 퇴보일 따름이다.

정치집단의 거짓 위선을 폭로하고 대중사회의 일탈 왜곡을 질책하는 창조적 소수는 ‘세상에 이끌려가는’ 수동적 다수의 인사이더가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가는’ 능동적 소수의 아웃사이더들이다.

법과 상식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며 온갖 궤변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꾼들, 진실의 이름을 빌려 현실의 안일을 도모하는 사이비 지식인 종교인들, 대중의 표피적 인기에 목을 맨 권력욕 명예욕 물욕의 노예들은 민주주의의 균형추인 아웃사이더를 핍박과 고난의 소외된 자리로 내몰기 일쑤다.

그렇지만 그 소외된 자리야말로 미래의 꿈이 튼실한 열매로 익어가는 생명의 터전이다. 3.5%의 미미한 소금기 덕분에 수많은 해양생물들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듯이, 저들 아웃사이더 덕분에 인류 역사는 정화되고 전진해간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창조적 소수, 능동적 이방인은 누구인가? 자유민주사회의 평형수인 아웃사이더, 그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몹시도 아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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