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타인을 위한 사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람

마르틴 니묄러(F. G. E. Martin Niemöller) 목사

악령의 손길이 덮쳐올 때 당신의 시선은? 

히틀러의 나치 독재에 저항한 독일 개혁교회의 마르틴 니묄러(F. G. E. Martin Niemöller) 목사는 원래 히틀러의 집권을 찬성했던 성직자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경제공황과 무질서의 확산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독일 사회는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약속하는 히틀러를 ‘독일의 메시아’로 칭송하며 그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나치 정권이 침략전쟁을 벌이고 유대인학살을 감행하면서 그 사악한 실체를 드러내자, 니묄러 목사는 나치에 대한 저항의 선두에 나선다. 그는 나치즘을 반대하는 성직자들과 함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설립하고, 나치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로마교황청마저도 히틀러에 협조할 만큼 나치즘이 전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 니묄러 목사는 히틀러 비판과 나치 반대를 앞장서서 외치다가 결국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치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저항할 줄 모르는 독일국민과 성직자들의 비양심적, 비신앙적 태도에 절망한 니묄러 목사는 ‘그들이 처음 왔을 때’(Zuerst kamen sie)라는 치열한 호소로 그들의 참회와 각성을 촉구했다.

처음에 나치는 사회주의자를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다음에 나치는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들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나치가 나를 잡으러 왔을 때
​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대의 고통이 된 히틀러와 나치의 무리는 니묄러에게 악령(惡靈)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타자(他者)의 고통에 무관심할 때, 그 고통은 곧 우리의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웃의 고통은 전쟁이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한 아픔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 곧 나의 아픔이다.

사람은 언제나 타자와 함께 있는 공동존재(Mitsein)다. 소통과 공감 없이는 결코 공동존재가 되지 못한다.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타자와 소통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인도에 홀로 떠밀려온 난파선의 표류자도 햇빛과 구름과 바다, 물풀과 새와 물고기, 그리고 언젠가 찾아와 닻을 내릴 구조선의 뱃사람들, 그 타자들과 더불어 있다. 현실에서든 의식 속에서든.

모든 고등종교가 가르치는 최고의 가치, 지상의 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그 대상인 타자를 필요로 한다. 아내와 남편이 있기에 부부애가 있고, 자녀가 있기에 부모 사랑이 있다.

애달픈 짝사랑에도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내 안타까운 사랑에 아무 반응이 없는, 목석(木石)처럼 야속한 그 타자 때문에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다. 젊은 베르테르가 샤를로테를 짝사랑하는 열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구 주체(主體)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한 <전체성과 무한>(Totalite et Infini)의 저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 Levinas)는 타자의 얼굴에서 나그네의 얼굴을, 고아와 과부의 얼굴을, 더 나아가 신(神)의 얼굴을 보았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을 절대타자(絶對他者)라고 부른다. 신앙은 절대타자인 신을 향한 사랑이다. 타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다.

나치에 저항한 또 한 사람의 성직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목사는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 타자는 버림받은 죄인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 사회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그 타인들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그들을 품어 안은 그리스도였다. ”진정한 교회는 타자를 위해 현존한다.“ 본회퍼의 신념이다. 이웃의 고통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국 자신의 고통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여기서 이웃과 자신은 하나가 된다.

인간의 모든 삶의 자리에 타자와의 관계성, 공동체적 책임윤리가 더불어 있다. ‘타인을 위한 사람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람인가?’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중요한 표지의 하나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권력에 굶주린 파시즘과 포퓰리즘의 악령들이 증오‧분열‧전쟁의 씨앗을 흩뿌리며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러시아‧중국‧북한의 철권통치 독재도 그 공포의 위력을 더욱 키워가는 중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가의 교리문답>으로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극단적 무정부주의자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동료 살인사건을 소재로 소설 <악령>을 썼다. “혁명을 위해서는 법‧규범‧도덕‧관습에 어긋나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네차예프의 신념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악령의 속삭임으로 들렸던가 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자유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도 권력을 잔인하게 쓰고 싶어하는 파시스트와 파렴치한 범죄혐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할 날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을 우상화하는 간특한 정치선동으로 국민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시킨 탓이다. 권력중독자들이 엮어낸 암울한 현실이다.

저 으스스한 악령의 손길이 우리 곁의 타인들에게 덮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바로 우리를 향해 덮쳐올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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