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예수님 ‘산상수훈 팔복’에 더한 ‘아홉번째 복’을 아십니까?”

광주 대인시장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성껏 ‘천원 밥상’을 차려준 생전의 김선자 할머니. 암투병 끝에 2015년 3월 18일 오전 별세한 할머니의 ‘해뜨는 식당’은 2010년 8월~2012년 5월 3가지 찬과 된장국을 곁들인 백반을 천원에 팔았다. ‘천원 밥상’은 시장에 채소를 팔러 왔지만 돈을 아끼려고 끼니를 거르며 노점을 하는 할머니들이나 독거노인들이 단골이었다. <사진 광주일보>

몇 해 전, 안타까운 소식 하나가 우리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광주 대인시장에서 천 원짜리 백반집 ‘해 뜨는 식당’을 운영하던 김선자 할머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김선자 할머니는 재래시장 안의 좁은 골목에서 밥과 국과 세 가지 반찬으로 차린 백반을 단돈 천원에 팔았다. 손님은 대부분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천원짜리 밥상은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장사였다. 식당수입이 가게 월세와 전기, 가스, 수도요금에도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장사는 없다. ​천원 짜리 밥상은 장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로 다가간 삶의 희망이었다. 싼값으로 한끼 밥을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다. 천원짜리 밥상에 담긴 할머니의 사랑이 가난한 이들의 메마른 가슴을 단비처럼 촉촉이 적셔주었기 때문이다.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김 할머니는 젊은 시절, 운영하던 사업이 실패하면서 빈곤의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그때 밥 한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참담한 나날을 어렵사리 버텨가던 중 교회와 이웃 등 주변에서 작은 도움을 주기 시작했고, 그 도움으로 할머니의 가정은 조금씩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 김 할머니는 그 도움의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빚진 마음을 할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갚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이 ‘해 뜨는 식당의 천원짜리 밥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빚진 마음, 이것이 양심을 지닌 사람의 성품일 터이다. 초월자에게서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고 믿는 신앙인만이 아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 빚진 사람들이다. 이름 모를 타인에게도 어떤 빚이든 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 가운데 무엇 하나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낸 것은 전혀 없다. 개인의 영역에서는 부모와 가족, 스승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빚을 졌고, 사회와 국가의 영역에서는 오늘의 번영을 가져다준 선인(先人)들, 선각자들, 땀 흘려 일하는 산업역군과 근로자들, 칼바람 맞으며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한겨울 새벽의 공공근로자들, 그리고 나라를 지키는 전후방 장병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지 체계는 공공의 부담률이 절대적으로 크고, 민간부담도 그 대부분이 기업 몫이다. 개인들의 복지비용 부담은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미미한 편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선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불우한 이웃을 배려하고 따뜻이 보살피는 일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후진성(後進性)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들의 자발적 복지 참여가 확대되지 않으면 문화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기 어렵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복지는 없다. 그런데도 국가나 기업의 혜택을 바라는 복지 요구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추세다. 기초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 노조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한 영세기업의 일용근로자,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년실업자들이 넘쳐나는데도 억대 연봉을 받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

제 자식에게 기업경영권을 넘겨주는 재벌이든, 대를 이어 고용을 승계시키는 대기업 노조원이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년실업자나 노조에 들어가지 못한 영세기업의 일용근로자들에게는 모두가 ‘딴 세상의 특권층’이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버린 사회에는 캄캄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타락했다. 공산주의 유물론(唯物論)보다 더 유물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천민(賤民)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비인간적인 물신(物神)숭배의 먹이사슬로 양극화와 사회갈등의 골이 깊어가는 오늘날, 냉혹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경쟁시장에 인간의 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소외된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어 안는 따뜻한 사랑이 절실히 요청된다.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여덟가지 복(福)을 가르친 예수는 또 다른 복, 아홉 번째 복을 알려주었다고 사도 바울은 전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복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원 어록(原 語錄)에서 사도 바울이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산상수훈의 여덟 가지 복이 ‘받는 복’이라면, 아홉 번째 복은 ‘주는 복, 베푸는 복’이다. 저명한 의사이자 저술가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 박사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주는 것, 베푸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다.

​’주는 복, 베푸는 복’을 현실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 김선자 할머니의 소박한 ‘천원 짜리 밥상’이었다. 김 할머니의 빚진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장 배부른 나눔의 식탁’으로 태어났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타인에게 어떤 빚이든 지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늘 무겁게 짓누른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김선자 할머니를 더 가난한 자리로 내려가게 한 그 빚진 마음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식상한 인사도 이제는 ‘복 많이 베푸세요’라는 아홉 번째 복의 기원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병상의 생전 김선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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